비싸도 한우만을 vs 싼맛에 푸짐하게
고시 관보 게재 연기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는 일단 보류됐지만 재협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잦아들 줄 모른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 현장에는 사람들이 더 몰려들고 있다. 쇠고기 업계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는 시간 문제로 본다. 미국산 쇠고기가 한국 시장에 들어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2008년 12월 말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래도족(族) vs 절대로족
직장인 장수근(가명·32)씨에게 올해 연말 송년모임은 쇠고기를 마음껏 즐기는 시간이다. 올해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되면서 쇠고기 값이 많이 내린 결과다. 장씨도 처음에는 광우병 공포 때문에 쇠고기 먹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한우와 비교해 품질이 그렇게 뒤지지 않으면서도 값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광우병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먹는다'고 마음을 굳혔다. 100㎡ 이상 넓이의 식당에선 모두 원산지 표시를 하고 있는데다 '식(食)파라치'들의 활약으로 원산지를 속이는 사례가 많이 줄어들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미국인 J씨는 스테이크 요리 재미에 푹 빠졌다.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일.
반면 방송국 PD 김모(37)씨는 미국산 쇠고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각종 매체를 통해서 쏟아지는 정보를 보고는 도저히 먹을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나와 가족, 아는 이들이 먹게 될까 두렵다. 직장인 이준혁(29)씨는 평소 즐기던 곰탕이나 설렁탕을 일찌감치 끊어 버렸다. 내장도 잘 안 먹는다. 오로지 돼지막창뿐이다. 직장인 이모(29·여)씨는 회식 때 한우만 취급하는 곳으로 간다. 호주사람 L씨는 음식재료 하나, 화장품 하나를 사면서도 성분을 꼼꼼히 살핀다. 혹시나 쇠고기 성분이 원료로 사용되지 않았나 불안해서 생긴 습관이다.
◆우리는 '절대로' 국내산만 취급합니다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오면서 국내 식당은 한바탕 구조조정을 겪었다. 한우 전문취급점과 대형업소는 끄떡없이 살아남았지만 중소규모 업소와 일부 업종 식당은 문을 닫았다. 살코기 취급점은 운이 좋았다. 그러나 막창이나 곱창·전골집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한우(국내산)만 취급한다'는 해명도 소용이 없었다. 막창집에선 쇠고기 막창과 곱창을 메뉴에서 지워버렸다. 일부 생고기집은 점포를 비웠다. 설렁탕·곰탕집도 사정이 어렵다. 근근이 버텨나가는 식당주들도 "이제 업종을 전환해야겠다"며 한숨을 내쉰다.
쇠고기 취급 식당에선 공통적인 풍경이 생겼다. 입구에서부터 '저희 업소는 신선한 순수 한우(국내산) 고기만 취급합니다'란 안내판이 붙었다. 실내 곳곳에도 스티커가 붙었다. 쇠고기 농장 전체 사진도 붙이고 운송차량 경로 안내도까지 붙였다. 일부 대형식당은 그래도 의심하는 손님을 안심시키겠다며 농장에 실시간 웹캠을 설치해 눈으로 확인시킨다. 예전보다 손님은 줄었지만 이런 노력 덕분에 그나마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은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한우를 찾는다. 미국산 쇠고기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찾는 메뉴가 됐다. 쇠고기 소비에도 양극화가 생겼다는 탄식도 들린다.
◆소비량 회복까진 '시간이 약'
이제 시점을 현재로 돌려보자. 지금으로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후 시나리오에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혼재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낙관론, 단기적으로는 비관론이다.
낙관론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인기를 근거로 삼는다. 미국산 쇠고기가 지난 2003년 12월 광우병 발병으로 수입이 중단되기 전까지 한국 수입쇠고기 시장에서 점유율은 75%, 금액으로는 무려 8억4천700만달러에 달했다. 쇠고기 수입업체 대표 박모씨는 "미국산 쇠고기가 품질면에서는 호주산보다 많이 낫다. 가격대도 한우와 경쟁력이 있다"며 긍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그는 지금의 부정적인 국민 여론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 당장 들여와도 안 팔리기 때문에 수입하더라도 소량만 팔리겠지만 연말쯤에는 한국 시장에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더라도 소비가 느는 데는 몇 가지 난관이 있다. 무엇보다 미국산 수입이 중단된 틈을 타 호주나 뉴질랜드산이 국내 시장에 빠르게 파고들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 여론은 더 큰 장애물이다. 앞으로 정부가 적절한 대책을 못 내놓으면 반대 여론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미국 쇠고기 대량 수요처가 없다. 유통업계는 물론이고 쇠고기를 식재료로 사용하는 유명 외식업체들도 소비자 불안이 해소될 때까지 판매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대구의 백화점들은 안전성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팔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마트·홈플러스 등 대형소매점도 향후 추이를 지켜보며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패스트푸드점(롯데리아·맥도날드·버거킹)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아웃백스테이크·빕스·TGIF·베니건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현재 호주·뉴질랜드산 쇠고기를 쓰고 있다. 미국산으로 교체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적극 홍보하고 나섰거나 이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형 납품처들 "사용 안 해"
학교나 군 등의 대량 납품처도 미국산 쇠고기 사용을 하지 않을 예정이다. 대구시교육청은 이미 학교 급식용 쇠고기로 국내산만 쓰고 있다. 유전자(DNA) 검사까지 실시하고 있다. 시교육청 급식 담당관은 "지난해에만 157회 검사를 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도 최근 군부대 급식과 관련해 미국산 쇠고기 사용 논란이 일자 "올해 8월부터 축산농가 보호 차원에서 국내산만 취급하겠다"고 입장 정리를 했다.
내장이나 꼬리, 우족 등의 부산물 수입도 관심사다. 수입업체 관계자들은 "수요가 많아도 광우병 의심 때문에 국내 소비자들이 싫어하는 부산물은 가급적 들여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쇠고기 수입업체 대표 박모씨는 "부산물은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업자들이 눈독을 더 들이고 서두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축산업자들의 수입 압력도 예상할 수 있다. 미국에선 식용으로 거의 소비되지 않는 내장 부위는 2003년 이후 수입이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현재 사료로만 쓰고 있는 소장을 한국으로 다시 수출할 경우 미국 축산업계는 연간 1천억원의 수입을 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검역 당국은 이와 관련, 샘플 비율을 평균 1%에서 3%로 높이고, 모두 해동을 거치고 조직 검사까지 거치기로 하는 등 강화 방침을 세웠다. 광우병위험물질(SRM)인 소장 끝부분(약 80㎝)이 발견될 경우 다시 문제가 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 전체를 뒤흔들 만큼 큰 상처를 남기며 수입이 재개된 미국산 쇠고기가 여전히 폭탄을 안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말 한국을 방문한 UN미래포럼의 제롬 글렌 회장은 2025년에는 이런 파동이 없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축산농가가 아닌 공장에서 쇠고기를 대량생산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 기술은 이미 실험단계를 완료한 상태. 2005년 퓨처리스트지에도 보도된 사안이다. 10여년 뒤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거리시위도 역사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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