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유부남이 사는 법-그대 일탈을 꿈꾸는가?

입력 2008-06-04 07:00:39

마르셀로 비르마헤르 지음/조일아 옮김/문학동네 펴냄

"미스터 키신저, 그렇다면 사랑을 하면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한 여자를 정복하면서도 매너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만년 가십거리만 쓰던 기자 A. 어느 날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인터뷰를 하게 된다. 온갖 인맥을 동원한 결과다. A는 여자와 하룻밤 자는 것에 말초적 갈증을 가진 인물이다. 넥타이를 매어 주던 아내는 "키신저를 만나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킨 걸 후회하지 않는지 물어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얼마 전 케이블카에서 짜릿함을 함께한 여인만 가득 차 있다. 어떻게 하면 아내와 여자들 사이에서 아무런 사고(?) 없이 즐길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 툭 튀어나온다. '어떻게 하면 사랑도 하고 아내와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키신저는 "아이 돈 노!"라고 말하고 일어서 버린다.

알다시피 헨리 키신저는 '줄타기의 달인'이다. 닉슨 전 대통령이 하야의 위기를 맞았을 때도 백악관에서 유일하게 냉정한 처신으로 일관한 처세술의 대가. 그조차도 모를 일이 바로 '아내와 애인 사이의 줄타기'이다.

'유부남이 사는 법'은 바람피우는 유부남의 일탈과 소시민적인 고민을 유쾌하게 그린 소설집이다. 지은이는 사춘기 때 극심한 우울증에 걸렸다가 글쓰기를 통해 힘을 얻은 아르헨티나 소설가. 1999년 출간한 '유부남 이야기'를 시작으로 '새로운 유부남 이야기'(2001년), '마지막 유부남 이야기'(2004년)의 시리즈를 냈다. 이 책은 세권 중 작가가 선별한 8편을 실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만난 여인이 인생의 마지막 여인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마지막 여인', 출장 간 아내와 아이들이 다른 남자를 만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신앙인들이 믿음을 갖는 진짜 이유' 등 여덟편이 실려 있다.

주인공들은 모두 전전긍긍하며 일탈을 꿈꾸는 소시민 가장이고, 남편이다. 어린 시절 사촌누이에게 이상한 짓을 하고 애태우는 30대 작가, 성인소설도 썼는데 동화작가로만 불리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한 60대 소설가 등이다.

일탈을 꿈꾸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찾거나, 현실을 떠나 새 출발하는 모험도 저지르지 못하는 이들이다. 아내가 아닌 여자를 만나는 짜릿함에 끌리면서, 집에만 오면 공연히 안절부절못한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 여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골똘하게 생각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지구 정반대인 아르헨티나. 그럼에도 현재 한국 유부남들의 말초성이 오버랩된다. 또 다른 여인을 만나 로맨스를 꿈꾸는 것은 지구상 수컷 동물의 영원한 로망인가?

지은이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극적 불륜이 아니라 행복한 결혼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불가능한 사랑과 허망한 로맨스에 애면글면하는 유부남의 소모적인(?) 관심이 유쾌하다. 398쪽. 1만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