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불운이 너에게 집중될 때
날은 마침 중복이다. 쾌활 냇가의 자갈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한쪽에 걸어놓은 양은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여자들은 수양버들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잡담에 빠져 있다. 파라솔 아래에 총무 집에서 양념해서 가져온 갈비 스무근, 신임 회장이 찬조한 개 한마리, 흑염소 전골 다섯냄비, 그 외에 상추며 풋고추 등속의 야채, 양념거리가 각각 광주리에 담겨 자그마한 산처럼 쌓여 있다. 오늘은 곗날이다. 가족도 동반했다.
이 계의 이름은 '상호친목계'다. '한번 계원이 되면 상호 간에 평생 친구가 되어 목숨을 걸고 서로 지키는 계'라는 긴 말을 줄인 것이다. 계원들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다. 지방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사람, 소소한 범죄를 지어 감옥에 갔다 온 사람, 월급쟁이,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좋은 사람들도 아니다.
계원들이 속속 도착하고, 일찍 도착한 계원들은 잡담을 나누면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나눈다. 계의 실제적 대표 격인 증경회장은 다른 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술을 받아 마셨고, 벌써 거나하게 취했다.
쾌활 냇가 위 지방도에 커다란 외제 지프가 멈춘다. 지프는 흙 길을 따라 냇가로 내려온 다음 멋진 반원을 그리며 멈춘다. 지프에는 도시에서 온 진짜 깡패들이 타고 있다. 깡패들은 지방도로에서 바라본 냇가가 그럴듯해 보여 내려왔다. 그러나 막상 내려와 보니 지방도로에서 본 것과 달리 그늘 한점 없고, 물도 깊지 않다. 그래서 지프는 막 떠나려고 했다. 그때 냇가에 먼저 진을 치고 있던 계원 한 사람이 욕지거리를 한다.
'뭐야, 저 ×끼들은'
한사람이 욕을 시작하자 계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욕을 쏟아낸다. 폭죽처럼 쏟아지던 욕 중에 몇 마디가 지프에 타고 있던 깡패 귀에 들린다. 똘마니 깡패가 차에서 내려 욕을 쏟아내던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는 거대한 덩치를 가졌으며 도시에서도 잘나가는 깡패다. 이런 데서 '동네 양아치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준엄하게 나무라고 사과를 받고 떠날 생각이었으리라.
'뭐야 너희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사과가 아니라 '너는 뭐하는 ×끼야?'라는 대꾸였다. 그래서 거대한 덩치의 진짜 깡패는 눈앞의 자그맣고 새까만 녀석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아랫도리를 힘껏 걷어찼다. 불이 붙은 듯한 통증을 느끼며 도시에서 온 진짜 깡패는 몸을 반으로 꺾는다. 지프에서 진짜 깡패 두사람이 더 내리고, 곗날 잔치를 벌이던 열명이 넘는 동네 아저씨 양아치들을 차례로 박살낸다.
그때 문득 아랫도리를 습격당해 누워있던 도시에서 온 깡패가 비명을 지른다. 계원 중 한사람인 계철이 엎어져 있는 깡패의 머리를 돌로 내리치고 도망간 것이다. 이제 깡패들은 계철을 쫓아간다. 깡패 셋이 나란히 계철을 추적한다. 양복을 입은 도시 깡패들이 거의 벌거벗은 계철을 쫓아 달린다. 계철은 아래로 위로 도망치다가 원래 위치로 돌아오고 또 달아난다. 계철은 냇가를 건너 산 쪽으로 도망간다. 깡패들과 계철은 달리고 또 달린다. 차 안에 타고 있던 깡패 부두목은 얼굴을 찡그리며 차를 도로로 빼라고 지시한다.
그늘을 찾아 다리 쪽으로 내려갔던 계원들의 부인들이 돌아와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한다. 낮술에 취해 코를 골며 잠들었던 증경회장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늘어지게 하품한다. 그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이들의 계 이름은 '상호친목계' 즉, 상호 간에 친구가 되어 목숨을 걸고 서로 지키는 계, 라는 말이다. 그래서 깡패들의 지프가 냇가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욕을 시작하자, 모두 나서서 욕을 했다. 그리고 함께 싸웠다. 그러나 계철이 목숨을 담보로 쫓길 때 동료들은 제 몸의 사소한 상처를 이유로 쓰러져 누워 있었다. 두목격인 증경회장은 세상모르고 잠만 잤다.
누구도 계철을 구할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서로 지켜야 하는 계원이지만 계철은 홀로 떨어져 달린다. 물론 홀로 떨어진 계철만 살아남을 수도 있고, 계철만 죽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함께 죽거나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함께' 싸움을 시작했지만 이제 각자는 '별개의 사건' 속에 개별적으로 산다.
이런 점은 도시에서 온 깡패들도 마찬가지다. 함께 죽고 함께 살자고 맹세하고 깡패가 됐고, 함께 싸움을 시작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깡패는 한명뿐이다. 부두목은 얼굴을 찡그리며 자동차를 자갈밭에서 빼 도로 위로 올리지 않는가.
비겁하거나 야속해 보이는 이들의 행위는 실상 우리 사회가 항상성을 갖는 근거다. 소방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때 무심한 눈으로 지금껏 마시던 술을 그대로 마시는 것,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앞에서도 제몫의 웃음을 터뜨리는 것, 세상의 모든 슬픔과 기쁨에 동참하지 않는 개인이야말로 우리가 항상성을 유지하는 배경일 것이다.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