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누구를 위한 실용인가

입력 2008-06-03 07:00:00

지난 4월과 5월 서울, 부산, 광주에서 발표와 강의를 하게 되어 그곳 사람들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하나같이 못살겠다는 이야기였다. 현 정부의 탄생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대구·경북 지역 주민들도 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과거 참여정부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현 정부에 쏟아지는 것 같다. '실용'과 '자율'에 기반을 두고 '선진화'를 모색하고자 한 현 정부의 정책은 기득권자에게 유리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불만이었다. '균형발전'과 '복지'를 중시하여 모두가 주인이 되고자 하였던 참여정부의 이념에서 허망함을 맛본 우리의 국민들은 CEO형 대통령을 뽑음으로써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불안 증세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을 맞는 오늘에도 MB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들로 인해 국민들은 과거 정권 못지않게 불안해하고 있다. 그동안 불거져 나온 영어 몰입교육, 대운하 개발정책, 교육 자율화, 수도권 규제 완화, 지방혁신도시 사업 수정, 공공기관장 인위적 교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독도 문제 등 여러 정책들과 관련하여 다양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표출되고 있다. 벌써 시민들은 현 정부의 내각에 대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 정치에 대한 허무주의가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과거 참여정부가 역사를 바로잡고 부당한 기득권을 단죄함으로써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지만, 진보엘리트주의로 인하여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삼으로써 균형발전이라는 이념을 현실화할 수 없었다. 지금의 정부 역시 과거를 묻지 말고 이념을 따지지 말며, 실용적 관점에서 누구나 자율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선진사회를 만들려고 하지만, 보수엘리트주의로 인하여 위기에 직면해 있다. 더군다나 국가 관리는 기업 경영과 다른 법이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들은 회사의 총수가 직원을 다루듯이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국 근대화 시기의 압축 성장을 위한 개발 논리를 다원적인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정치가 더 이상 경제 논리에 일방적으로 포섭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원래 정치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일정한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을 고민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활동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사적인 이익이나 목적을 위한 시장의 논리가 지배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고대의 정치적 활동의 장인 광장(아고라)은 공적 영역으로서, 여기에는 경제적 활동을 하는 사적 영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광장은 모두의 광장이 아니었다. 광장에서 배제된 자들, 이른바 상인들은 혁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근대 시민사회는 시장의 힘이 개입하면서 광장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경제적 영역이 정치적 영역을 압도하면서 광장을 시장에 종속시켜 버리는 이 현실 역시 또 다른 억압적 체계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시장과 광장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공론장을 활성화시켜야 할 다급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언어와 노동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교환하며 살아간다. 정치 역시 소통의 토대 위에서 작동하여야 한다. 그러나 소통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이해는 서로의 역사에 대한 체험과 그 체험을 표현하는 과정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여정부가 좌절을 겪고, 실용정부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도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 구성원들의 삶을 체험하고 그들이 표현하는 것에 참여하여 소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리 멋있는 옷도 자신의 몸에 맞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가 구성원들의 역사적 조건에 맞지 않으면 무용하기 마련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정치를 함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국민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들의 표현에 귀를 기울여 함께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용'도 '자율'도 누구를 위한 '실용'이며, '자율'인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실용'과 '자율'에 내재되어 있는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하려면, 우리가 함께 소통해야 한다는 연대성의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석수 경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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