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서리 처지는 살인예고…알 파치노의 '88분'

입력 2008-05-31 07:26:51

가장 스릴 넘치는 것이 시한폭탄 해체다.

째깍 째깍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 안에 풀지 못하면 터져버리는 위기는 관객을 자리에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이 하드2'를 비롯한 액션영화에서 많이 쓰는 타임라인 기법이다.

그 중에 미국 드라마 '24'는 실시간 스릴러의 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알 파치노 주연의 '88분'은 러닝타임 108분 중 88분이 현재진행형이다. "88분 후 너는 죽게 될 것이다"는 휴대폰 속 살인예고의 음성. '24'는 디지털표지판 시간을 화면에 보여주지만, '88분'의 살인자는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죽기 0분 전'이란 표시를 해 놓는다.

세계 최고의 범죄 프로파일러(범행수법의 유형을 연구하는 수사관)이자 법의학자인 잭 그램(알 파치노). 그는 살인자들의 '공공의 적', 늘 살해위협 속에 살고 있다. 연쇄 살인마 존 포스터(닐 맥도노프)의 유죄확정을 축하하는 파티 다음날도 그랬다.

파티장에 있던 여학생이 끔찍한 변시체로 발견되고, 현장에는 잭의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다. 존 포스터와 유사한 범죄 수법. 모방범죄일까, 아니면 포스터가 무죄일까. 살인 용의까지 받는 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88분 후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그를 위협하는 온갖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강의실 칠판에, 차 트렁크에, 아니면 전화를 통해 수시로 '마감' 시간을 알려주고, FBI의 수사망도 좁혀진다.

대배우 알 파치노는 노구를 이끌고 위기탈출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인썸니아'(2002년)에서 불면증에 걸린 형사의 나른함을 보여주었던 그는 '88분'에서는 좀 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술과 섹스로 세상을 잊으려는 프로파일러, 숙취에 어찔해 아침에 일어나면 나체의 젊은 여성이 옆에 누운 활기찬(?) 남성이다. 그러다보니 사건이 터지자 모두가 적으로 보인다.

파티 후 뜨거운 밤을 보낸 법대 여대생, 가방 속에 총을 넣고 다니는 여자 조교, 충실한 동료였던 사무실 여직원, 거기에 가죽재킷의 의문의 남자와 알고 보니 살인마를 수시로 면회한 남학생까지 모두가 용의 선상에 올려도 좋을 인물들이다.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 속에서 주변을 살피는 그는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온 셈. 추측과 위증으로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살인마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내보내는 TV, 그의 사형 집행을 반대하는 배심원, 그 속에서 정의와 진실을 지키려는 노력은 처절하다.

'88분'은 알 파치노를 위한 영화다. 과거 폭발적인 카리스마는 없지만,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초조해하며 큰 눈을 굴리는 특유의 표정은 여전하다. 그러다보니 조연들이 모두 죽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쉬'(1996년)에서 뇌쇄적인 모습을 보여준 데보라 카라 웅거나 2004년 피플지 선정 미국 최고의 신랑감에 뽑힌 벤자민 맥켄지 등은 거의 카메오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왜 88분인지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면서 한 차례 급물살을 타는 듯 하지만 영화는 상투적인 스릴러의 길을 걷고, 결말도 그렇다. 살인범도 세계 최고의 프로파일러의 노련한 솜씨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88분에 맞춰 와르르 등장해버린다.

감독 존 애브넛은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1991년)라는 멋진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작은 전쟁'(1994년)과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셀 파이퍼 주연의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년)도 그의 작품이다.

'88분'은 그가 처음 도전한 스릴러다. 멜로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의 섬세한 감정선까지 터치하던 그가 스릴러에서는 아무래도 디테일이 서걱거린다. 그러고 보니 지난 10년간 그는 영화보다는 제작에 치중했다. 영화 연출 공백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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