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乙의 반란

입력 2008-05-24 09:36:13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기업이 성장 주역이고 공무원은 후원조직'이라며 甲(갑)과 乙(을)이 바뀌었다고 말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정부가 主役(주역)을 맡고 기업이 助演(조연)으로 국정을 이끌었던 시대는 가고 공직자들의 서비스 정신이 필요한 시기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통적인 갑과 을의 관계가 깨지고 있다. 대기업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눌려 지낼 수밖에 없던 중소기업들이 납품단가 인상 등을 요구하며 실력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생산하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은 최근 휴대전화 부품을 임가공하던 몇몇 협력업체들이 납품을 중단하는 바람에 일부 생산라인이 멈춰서는 유례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던 협력업체가 국내 최대 기업에 反旗(반기)를 들자 삼성전자는 당황했고 산업계도 놀랐다.

이에 앞서 지역 주물업체와 아스콘업체들이 고유가 및 고환율로 인한 원자재값 상승 등을 이유로 납품가 인상을 요구하며 집단 납품 거부운동을 벌였다. 대기업의 부당한 대우에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었던 중소기업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요구를 관철시키며 을이 판정승을 거뒀다.

삼성전자 협력업체의 경우 줄다리기 끝에 반기를 들었던 일부 업체는 기존 협력관계를 유지시켜 주고 납품단가 인상을 약속한 반면 막판까지 버틴 업체와는 계약을 해지했다. 문을 닫게 된 업체의 종업원들은 동종업종에 취업을 주선해 주기로 해 큰 파장 없이 사태가 마무리됐다. 삼성 사태의 경우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양자 모두 상처만 입었다. 하지만 영원한(?) 약자로 여겼던 을이 갑에게 반기를 든 것만 해도 삼성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업계와 개별 기업들간의 특성으로 인한 나름대로의 사정은 있겠지만 어쨌든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고 사회적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번졌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慣行(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고 용인돼 왔던 각종 불합리한 규칙과 틀들이 깨지고 있다. 아니 바로잡히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도 철밥통처럼 자신들의 영역을 고수하고 있는 분야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홍석봉 중부본부장 hsb@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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