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테두리 밖에는 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3개월을 머물 때였다. 당시 나는 방이 3개인 작은 집에서 남아공 현지인 한 명, 브라질인 여행자 두 명과 살았다. 이렇게 국적이 다른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살게 된 건 우리 모두 남아공의 물가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다. 네 명이서 집세를 나눠냈기 때문에 생활비를 아낄 수 있었고, 나의 빵과 우유가 떨어지면 동거인에게 빌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청승을 떨며 무슨 여행을 하느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다. 나는 당시 현금카드 사기를 당해 여행경비를 모두 털린 상태였다. 그렇게 하고도 여행을 하겠다고 버티며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청승이라면 청승이다. 하지만 나의 동거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나와 방을 나눠 쓴 메리엘리는 달랑 100만원을 들고 멀리 브라질에서 아프리카까지 날아왔다. 그녀는 비상금 100만원은 꼭꼭 숨겨둔 채 레스토랑 서빙, 포르투갈어 과외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밥을 먹고 있었다.
"여행이란 그 나라에서 일을 해보는 것, 그 나라에 단골 찻집과 단골 디스코클럽을 만드는 것, 그래서 그 나라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보는 거야."
그 나라에서 필요한 만큼의 여행경비를 몽땅 싸들고 와서 그 나라 관광지 입장료로 몽땅 다 써버리고 돌아가는 것이 그동안 나의 여행이었다. 메리엘리는 그런 나를 부끄럽게 했다.
오랜 여행을 하면서 나는 '여행을 하는 이유'를 배웠다. 북유럽의 핀란드에서 만난 어느 일본 여학생은 신발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 신발 디자이너가 될 거야. 그래서 세상에 숨어있는 놀라운 신발 디자인을 찾아다니는 거야. 넌 왜 여행을 하니?" 그녀에 비해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답답하고 심심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말하기는 싫었다.
"사람을 만나려고. 30년 동안 살아온 내 삶의 테두리 밖에는 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거든."
대답하고 나서, 나는 갑자기 고개가 끄덕여졌다. 메리엘리와 신발을 찾는 여학생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내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곳으로 떠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여행을 하다보면 별난 여행자들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세계일주여행을 하며 자신이 머문 숙소마다 친필 사인이 담긴 일기를 남기며 그 숙소를 거쳐가는 전세계 여행자들에게 자신의 여행이야기를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있는 사람(이 사람의 이름은 이미 여행자들 사이에 유명해져서 '여행 스타'로 불리고 있다. 여행자들 중에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 여행코스를 잡는 마니아도 생겼다),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처럼 세상의 그 누구도 그리지 않은 미지의 땅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몇년동안 전세계 오지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런 특별한 전설이 되지는 않더라도 나 역시 무언가 멋진 이유를 찾아 여행을 하고 싶다.
터키에서 1년동안 신혼여행을 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혼인신고 도장을 찍기 전에 딱 일년만 함께 세계여행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여행을 해보면 서로의 마음 밑바닥까지 확인할 수 있어. 여행하는 동안 벌써 수없이 싸우고 수없이 서로를 용서해온 것 같아. 이제 이 사람이랑 평생을 함께 할 자신이 생겼어." 한국에 돌아가면 그들은 드디어 혼인신고를 하고 예쁜 부부가 된다. 서로에게 훌륭한 반려자가 되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그 이유 역시 얼마나 멋진가.
아프리카에서 나는 또 별난 일본인 여학생을 만났다. 작은 키에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학생은 제 키의 3분의 2를 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그 위에 배낭 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사각형의 스피커를 두 개씩이나 달고, 거기에다 북까지 달고 다녔다. 내가 그 별난 장비들을 신기해하자 그녀는 "일본에서 타악기를 공부하고 있어. 세상의 모든 타악기란 타악기는 다 연주해보고 싶어"라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자마자 커다란 스피커를 방 한가운데 설치하고 음악을 틀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익숙해진 아프리칸 리듬이었다. 그녀가 북을 치자 방안의 다른 여행자들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시골마을의 작은 방 안에서 여행의 낯선 설레임과 자유가 폭발할 듯 들썩거렸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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