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고교 시절을 보낸 이신정(42·여)씨는 이맘때마다 스승의 날을 떠올리며 살포시 미소짓곤 한다. 몇백원에서 몇천원까지 반장이 돈을 거둬 꽃과 케이크 등 조그만 선물을 마련해 선생님께 드리고 함께 축하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때문이다. 이씨는 "친구들과 뭘 드릴까 고민하다 총각 담임 선생님에게 향수를 선물했던 추억이 생각난다"며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나눠 먹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15일은 해마다 다시 돌아오는 스승의 날이다. 초·중·고교 12년을 보낸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할 선생님 한두분은 있기 마련. 이 날 하루 만큼은 '하늘 같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 드리며 학창시절의 향수에 젖어든다.
그러나 스승의 날을 맞는 요즘 스승과 제자의 풍경은 예전 같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스승의 날은 1980,90년대와 사뭇 달라져 스승과 제자의 정을 나누기는 커녕 '잔인한 날'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촌지 말썽이 잦아지면서 스승의 날을 없애자거나 2월말로 옮기자는 여론이 높아졌고, 급기야 2006년부터는 대구를 비롯한 전국 학교마다 스승의 날 휴업이 대세가 돼 버렸다.
"스승의 날이 스승에게 감사하는 날이 아니라 한낱 이벤트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예전엔 학생들 스스로 스승의 날 축하 플래카드를 붙이고 꽃을 준비했지만 이젠 교육청이나 학교 예산에서 모두 처리합니다." 대구 한 중학교 교사는 "플래카드나 꽃보다도 스승을 대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더 가슴 아프다"며 "잘 가르치지 못한 스승의 탓인지, 시대의 탓인지 잘 모르겠다"고 자조했다.
스승의 날이 처음 유래했던 때를 돌아보면 오늘의 세태가 더 슬퍼진다. 스승의 날은 1958년 충남 강경고 RCY(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병 중이거나 퇴직한 은사들을 위문한 데서 유래했다. 학생들의 선행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63년 '은사의 날(5월26일)'이 처음 제정됐고 2년 후인 65년부터 세종대왕 탄생일인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해 RCY뿐 아니라 전국 모든 학생이 참여하게 된 것. 정부가 73년 폐지했지만 82년 다시 부활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촌지가 문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부 학부모들과 교사들의 촌지 관행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고, 압박감을 견디다 못한 학교들이 스승의 날을 재량 휴업일로 지정해 촌지 파문을 원천 차단하기 시작한 것. 대구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 한해 대구시내 205개 초교 가운데 스승의 날에 정상 등교한 경우는 단 1개교에 불과하다. 이런 스승의 날을 맞는 스승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대구 한 고교 교사는 "스승에게 감사하는 날에 제자와 스승이 서로 만날 일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스승의 날에 대한 왜곡과 훼손 정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변화의 바람도 불고 있다. 올해 경우 스승의 날 휴업하는 대구의 초교는 단 1개교로 지난해와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석가탄신일 다음날인 13일을 재량 휴업일로 정한 학교가 많아 연거푸 쉬기가 곤란한 점도 있지만 스승의 날의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은 때문이다. 무너진 교권을 다시 세우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신뢰와 사랑을 쌓으려면 스승의 날부터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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