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숙종 38) 5월 15일, 청은 백두산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정계비를 세웠다. 당시 압록강 일부지역과 두만강 건너편 일부 지역은 주인 없는 땅.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백두산이 청나라 발상의 영산이라 하여 그 귀속을 주장하며 관리를 파견하여 건립을 강행했다. 이때 조선 측의 담당관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중국 관리가 조선 측의 접반사 군관, 통관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방 4km, 해발 2,200m 지점이었으며, 비석에는 위에 大淸(대청)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 각서하였다. 이후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간도 개척에 착수하자 조선은 정계비를 조사, 자국 영토임을 주장했다. 두만강 북쪽에서 '송화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의 하나'라는 우리의 주장과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는 중국 주장으로 인해 '간도문제'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현재 중국은 백두산을 '창바이산'이란 명칭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등 이른바 '백두산 공정'을 펼치고 있다. 이후 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때 일제가 철거,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1855년 종두법, 지석영 출생 ▶1982년 스승의 날 부활
정보관리부 이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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