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 영화일까 만화일까?…'스피드 레이서'

입력 2008-05-10 07:10:28

1970년대 '달려라 번개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골목에서 엄마의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고! 고!"를 외치던 아이들이 지금은 40, 50대가 됐을 것이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한 '스피드 레이서'는 '달려라 번개호'가 원작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요시다 다츠오의 만화를 1967년 52부작 시리즈로 만든 '마하 고고고'다.

'매트릭스'에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관을 초록의 단일 색채로 선보였던 워쇼스키 감독은 '스피드 레이서'에서는 월남치마처럼 강렬한 원색적인 톤으로 영화를 도배질해놓았다. 마치 스크린을 캠퍼스로 삼아 색칠놀이를 한 듯하다. 팀 버튼 영화의 색깔이 레이싱 애니메이션에 덧칠된 느낌이다.

가수 비가 출연해 한국에서 더욱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줄거리는 단순하다.

어려서부터 레이싱에 빠져 있던 스피드레이서(에밀 허쉬). 촉망받는 레이서였던 형이 레이싱 도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가 레이싱계의 총아로 떠오른다. 그를 눈여겨 본 대기업 로열튼 회장이 스카우트를 제안한다. 가족과 팀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그는 우승 조작도 서슴지 않는 그에게 혐오감을 느껴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어 로열튼의 보복이 이어진다. 막다른 길에 몰려 있던 그와 가족에게 경찰이 다가온다. 그리고 로열튼에 대항하는 토코칸 모터스의 리더 태조(비), 정체 불명의 '레이서 X'(매튜 폭스)와 팀을 이뤄 전설의 경주인 카사 크리스토에서 우승하면 태조가 로열튼의 비리를 폭로할 것이라는 제안을 한다.

가족회사 레이서 모터스를 살리고, 진정한 레이싱의 세계를 선보이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의 경주에 참가한다.

워쇼스키 형제는 일본 애니메이션광이다. '매트릭스'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를 보고 모티브를 얻었다.

이제 그들은 아예 대놓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디지털 캠퍼스에 옮겨온다. 롤러코스트 같은 고공 레이싱과 땅에서 치솟아 공중제비를 하는 등 실사로는 불가능한 화면효과를 특수효과로 스크린에 그려 넣었다. 계곡을 뛰어넘어 얼음 절벽을 타고 오르는 레이싱 카들의 결투가 셀 애니메이션을 즐기던 세대에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레이싱 카들마다 장착된 비장의 무기로 레이싱 도중 격투를 벌이는 모습은 과거 애니메이션의 속도감을 마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고! 고!'를 외치는 레이서의 모습을 겹친 화면으로 보여준다거나, 관람석에서 터지는 후레시 세례, 공중에서 180도 회전하는 레이싱 카 등 60,70년대 애니메이션의 화면효과도 그대로 옮겨놓았다.

이들 장면은 모두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린 것들이다. 영화의 98%가 블루스크린 앞에서 연기했고, 나머지 2%도 모두 세트에서 제작됐다. 광활한 사막과 산악에서 레이싱이 펼쳐지지만 영화는 100% 실내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화면은 한 없이 화사하고, 내용은 한 없이 가볍기 때문에 '매트릭스'의 심오하고 진지함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한 없이 실망스러울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잣대를 들이댈 여지도 없다. 스피드 레이서의 부모로 나오는 존 굿맨과 수전 서랜든도 어떻게 색칠을 했는지 아주 젊어 보인다. 한국 관객이라면 관심을 가질 비는 일본인과 같은 설정으로 나온다. 다혈질의 사나이로 나오지만 대사도 많지 않고, 그나마 판에 박힌 표정들이라 연기라고 할 건더기가 없다.

레이싱에 긴장감 없고, 깊이 있는 철학도 엿보이지 않고, 반영된 미래관도 없다. 판에 박힌 가족애와 천편일률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다. 한마디로 만화 같은 영화다. 이런 영화에 시각혁명 운운하는 것은 아무래도 과하다는 느낌이다.

집 거실에서 팝콘을 먹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던 워쇼스키 형제가 "어여! 우리 저거 영화로 만들어볼까?"라고 했음직한 대화가 실제로 거대 자본을 들여 만들어진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나저나 영화는 왜 이리 길지? 133분. 12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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