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초등학교 1학년 때, 짝이 세번 정도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번째 내 짝. 별로 말도 없고 항상 바른 생활만 하던 내 짝이 하루는 학교에 오질 않는 것이다. 그땐 지금처럼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었고 그 당시 짝 집에는 전화가 없었는지 선생님도 아이의 행방을 모르고 걱정하고 있을 즈음, 미닫이문을 열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내 짝이 문 앞에 서있었다. 선생님의 물음에 아주 가느다랗게 '엄마가 어젯밤 각중에 돌아가셨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각중'이라는 처음 듣는 말이 뭔지 모르지만 어쨌든 엄마가 돌아가셨단다.
정말 어린 마음에 어떻게 위로도 해 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날 난 4교시가 끝날 때까지 짝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엄마가 밤늦게 돌아가시고도, 늦게라도 학교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순수하고도 여린 내 짝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후 짝의 표정은 늘 어두웠다. 항상 필통 속에 가지런히 연필을 깎아 챙겨왔었는데, 어느 순간 연필심이 다 닳아 나무 결이 삐죽삐죽 튀어나올 정도로 여분의 연필을 챙겨 오지 않아 필기하기 곤란해했었던 기억이 난다.
한창 연필깎이가 유행이었지만 집에 연필깎이를 두고도 우리아빠는 밤마다 잘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심을 갈아 다섯 자루의 연필을 필통에 담아 두셨다.
그동안 짝의 아빠도 그렇게 했을 것이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세아이의 엄마 아빠 노릇을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어 연필을 깎아 줄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내 연필을 건넸을 때 짝은 극구 사양하며 내일은 아빠가 꼭 연필을 깎아 주실 거라며 걱정하는 나를 오히려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내 나이 일곱살, 그때 나는 엄마의 소중함을 알았고 두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더 절실히 느낀다.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내 딸들아, 엄마가 많이 사랑해."
이선민(대구 수성구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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