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56) 시인이 지난달 29일 대구시내 모 극장에 나타났다. 한국영화 '가루지기'의 시사회장이었다.
봉태규와 김신아 주연의 '가루지기'는 천하의 '물건' 변강쇠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18세 관람가 등급의 영화다. 변강쇠는 80년대 이대근 주연의 에로영화로도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음란한'(?) 영화를 보러 나온 것도 이상한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이다. 이날 '가루지기'의 신한솔(35) 감독이 개봉을 하루 앞둔 바쁜 시간에도 대구에 내려와 시인과 함께 '가루지기'를 감상했다. 신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16기 출신으로 2005년 '싸움의 기술'을 연출했다. 문학계의 지성과 영화계의 신예가 '가루지기'를 두고 입을 열었다.
우선 이 시인의 영화출연 사연이 궁금하다.
'가루지기'는 평소 꼿꼿하고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시인이 출연하기에는 불경스런 영화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신 감독이 이 시인을 만난 것은 지난해 4월 문학과 지성사의 문학 포럼에서다. 평소 시인을 흠모한 감독은 얼굴선이 뚜렷한 시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고, 지난해 11월 촬영 하루 전에 캐스팅을 제안했다. 의외로 선선히 승낙했다. 촬영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이뤄졌다.
시인의 역할은 '나룻배 양반'역. 나룻배를 탄 기생들이 변강쇠의 양기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가운데 세상을 달관한 양반이 대사를 치는 장면이다. "화는 요행으로 면할 수 없고, 복은 두번 다시 구할 수 없나니,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 음욕으로 흥한 자 음욕으로 망하는 것이외다"라는 대사다.
1분 30초를 중간에 컷 없이 한꺼번에 찍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나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 NG를 내면 다시 찍어야 되는 부담스런 장면. 영화는 7번 만에 OK사인이 났다.
이 시인은 "내가 NG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애를 먹기 때문에 긴장을 해서 연기를 했다"고 말했다. 신 감독은 "안정된 목소리에 카메라의 부담도 없이 완벽한 연기를 했다"며 "얼마나 열정적으로 연기하는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최종 편집에서 삭제됐다. 여성성을 부각시키겠다는 감독의 의도에서 벗어난 때문이다. 영화를 본 후 이 시인도 "대사가 영화의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삭제한 것이 맞다"고 했다. 결국 나룻배에 탄 양반의 모습만 짧게 보이는데, 수염 분장까지 해 이 시인임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첫 영화 출연에 대해 이 시인은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가루지기'는 80년대를 대표하는 남성적 힘의 아이콘이었다. 오줌발로 산불을 끄고, 동네 아녀자들의 원초적 욕망을 폭주기관차와 같은 힘으로 해소해 준 총아였다.
신 감독은 "2008년 판 '가루지기'는 남성과 여성의 위치에 약간의 변화를 주고, 더욱 흥겹게 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영화에서 변강쇠는 힘은 세지만 '밤일'은 시원찮은 인물로 나온다.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것도 통상 남자들이었으나 이 영화에서는 동네 아낙들이다. 남정네들이 빨래터에서 수다를 떨고, 여인네들은 이런 남자들을 구박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까지 영화들이 남성의 훔쳐보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그쳤다면, 이 영화는 성을 재료로 하고 있지만 성을 둘러싼 문화와 계급, 집단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평했다. 이런 성의 구도는 현대 남성과 여성상을 닮아있다. 감독은 "요즘 성의 전복은 곳곳에서 드러나지 않느냐?"고 했다. 변강쇠역의 봉태규는 마초적이기보다 보듬어주고 싶은 귀여운 남성형이다. 영화에서 성에 목말라하는 여성들은 성보다 계급과 집단에 대한 진출을 갈망하는 여성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는 민간설화에 다양한 타악과 판소리, 무용 등으로 흥겨운 축제로 영화를 끌어간다. 개울에서 멱을 감다 수중발레 공연을 선보이며, 강쇠의 오줌발이 산을 넘을 때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산천을 뒤덮는다. 광녀 달갱이(김신아)가 휘영청 달빛이 흐르는 외나무 다리에서 추는 춤은 관능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인은 "프랑스 문학의 대문호 라블레의 카니발(축제)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라블레(1483~1553)는 수도사로 시작해 의사, 작가, 외교가로 활동한 휴머니스트. 민중이 삶, 육체의 복권을 유쾌한 축제로 그려낸 인물이다. 시인은 '가루지기'에서 라블레가 중세 금욕주의에 대한 반발로 그린 육체적 이미지와 배설, 성욕 등 자연적 기능에 대한 민중의 축제를 본 듯하다. 영화에서 비를 기다리며 마을의 아낙들이 옷을 풀어헤치고 모여 춤추는 기우제는 이런 카니발의 유쾌함을 흥겹게 풀어주고 있다.
감독이 "'부실한 변강쇠' 설정 때문에 일부 남성팬들이 80년대 대근이 형(兄)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고 말하자, 시인은 "그럼 여성팬들이라도 많이 보면 되잖아"라고 받아쳤다. 80년대 변강쇠와 달리 2008년 '가루지기'를 보기 위해 몰리는 여성관객들, 그 또한 새로운 풍속도가 아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이성복 시인 '영화 외도' 물어보니
이 시인은 "이런 영화인 줄 알았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그냥 에로영화인 줄 알았지. 나는 언제든 사고 칠 준비가 돼 있잖아"라고 웃었다. 이 시인은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과감한 시 문법의 파괴와 번득이는 비유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발표한 시집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아, 입이 없는 것들' 등도 많은 이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출연에 대한 부담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여러 번에 걸쳐 "망가지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그는 몇 년 전에도 이병헌 화백의 누드화에 알몸으로 모델이 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칼에 베이면 허연 것이 드러나. 이것이 뼈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지. 바닥에 대한 정서, 진실 욕망이라고 할까." 그는 흡사 아이들이 방귀를 뀐 후 냄새를 맡아 보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영혼의 칼 갈기 같은 것이냐"는 질문에 "칼은 이미 갈려 있어. 다만 다시 확인할 뿐이지"라고 말했다.
이 시인은 영화를 상당히 많이 보는 편이다. 특히 '구토유발자들'이나 일본 교포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 등 강하고 자극적인 톤의 영화에 대해 후한 점수를 매기곤 하는데, 끝까지 가보려고 하는 본인의 욕망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첫 영화 '가루지기'에 이어 올해 또 다른 영화에 출연할 계획이다. 이명세 감독의 차기작 '사무라이'다. "이명세 감독이 일본 촬영 때 같이 가자고 했어." 이 영화에서도 그는 말을 타는 사무라이가 밟고 올라타도록 엎드린 역을 맡게 해 달라고 했다. 이날 신 감독도 차기 작품에 출연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 시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카프카의 '변신'을 꿈꾸는 것일까.
김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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