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주민번호가 없다면 집을 사거나, 은행과 거래를 틀 수 없다. 인터넷 쇼핑을 할 수도, 이메일을 보낼 수도 없다. 몸이 아파도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으며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주민번호는 국가가 찍어준 '낙인'이다. '내가 누군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자, 모든 개인 정보로 통하는 '만능 열쇠'다. 나만 알면 유용한 수단이지만 남이 알면 치명적인 주민번호.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정보화 사회의 만능키, 주민번호
지난달 25일 오후 대구시내 한 구청을 찾았다. 주민등록관리시스템을 통해 기자의 개인 정보를 추적했다. 주민번호를 입력하자 주소와 이름, 가족, 병역, 주소 변동 내역, 세대주 등 다양한 개인 정보가 수초만에 일목요연하게 표시됐다. 세무 조회 시스템에 입력하자 지방세 체납 여부나 재산 상태 등이 표시됐고 내야할 과태료가 있는지, 취학 자녀, 국외 이주 여부 등이 쉽게 드러났다.
한 시중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금융 내역 조회를 의뢰했다. 주민번호를 제시하자 해당 은행의 거래 내역과 신용카드 사용 내역, 연체 여부, 신용도, 부채 등 거의 모든 금융 거래 기록이 조회됐다. 가장 은밀한 개인 정보인 범죄 경력은 어떨까. 경찰에 문의하자 "주민번호만 있으면 사는 곳과 가족, 연락처는 물론이고 전과, 벌금, 구류, 과료, 몰수 등 형사 처벌을 받은 모든 기록이 조회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형사 입건이 됐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사건 기록까지 남아있다는 설명도 붙었다. 기자의 건강 상태도 주민번호로 알아볼 수 있었다. 건강보험 데이터베이스에는 병력(病歷)과 치료 받은 병원, 치료 내용, 기간 등이 모두 저장돼 있다.
인터넷에서는 주민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회원 가입을 할 수 없고, 게시판에 글을 남길 수 없다.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에 따르면 지난해 7월 현재 주요 223개 사이트 중 91.5%인 205개 사이트가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등록번호 없이 회원 가입을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해당 사이트 서비스를 유료로 이용하고 결제를 하려면 다시 주민번호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 결국 주민번호만 넣으면 누가 어디서 태어나 어디에서 살아왔으며 취미는 무엇이고 돈은 얼마나 벌고 쓰는지, 빚은 얼마나 되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가족은 몇 명이나 되고 이혼 경력이 있는지, 어떤 사이트를 주로 찾고 구입한 물건은 무엇인지 어떤 공연을 보는지, 어떤 이들과 교류하는지 등 거의 모든 개인 정보가 까발려지는 셈이다.
◆도용되도 속수무책
나도 모르게 도용되는 주민번호. 명의도용 조회 사이트를 통해 기자의 주민등록번호로 가입한 홈페이지를 조회해봤다. 모두 115건이 검색됐다. 이 중 실제 회원 가입을 한 사이트는 53곳으로 절반도 안 됐고 생전 들어본적도 없는 온라인게임 사이트에도 무려 23곳이나 가입돼 있었다. 그 외에도 가입한 적이 없는 쇼핑몰과 백화점 사이트, 편의점, 제과업체가 수두룩했다. 누군가 기자의 주민번호를 도용해 온라인 게임을 즐기고, 쇼핑을 하는 셈이다. 인터넷 가입 정보 사이트를 통해서도 인터넷 활동 내역도 확인해봤다. 최근 한달 간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명확인을 한 건수는 모두 14건. 실제 기자가 직접 실명확인을 한 사이트는 한 건도 없었고, 모두 4월 28일 오후 5시 30분을 전후로 집중적으로 인증이 시도됐다. 누군가 기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곳곳에서 실명 인증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었다. 열이 뻗치고 분통이 터졌다. 내 주민등록번호로 누군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닐지 몰라 섬뜩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처럼 주민등록번호가 도용당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없다.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직접 명의도용된 사이트를 찾아 일일이 탈퇴를 해야하고, 늘 '뒷북'을 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잇따르면서 정부는 주민등록 대체수단(i-PIN) 도입을 의무화하고 인터넷 상에서 주민번호 등 개인정보를 저장할 때 반드시 암호화하는 등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아이핀'은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신용카드나 휴대전화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발급 받는 것이 가능하고, 개인정보가 집중되는 아이핀 사업자가 해킹 등의 피해를 입을 경우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민단체 진보네트워크의 장여경씨는 "기업체가 개인에게 부여된 모든 공적 번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누구든지 재발급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며 "장기적으로 개인식별 번호를 '목적별 번호'(해당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번호)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주민등록번호 어떻게 만들어질까?
주민등록번호 13자리는 생년월일과 지역번호, 해당 동사무소의 등록 순서, 검증번호 등을 조합해 만들어진다. 생년월일 뒤 7자리는 성별과 출신지 동사무소의 고유번호, 식별번호, 검증번호로 구성된다. 성별의 분류는 1800년대 출생은 남자 9, 여자 0으로 시작되고 2000년대 생 이후는 남자 3, 여자의 경우 4가 처음 붙는다.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되기 시작한 건 1968년 5월부터다. 각 시·도에서 18세 이상 남녀에게 부여하던 시·도민증을 통합하면서 만들어졌다. 주민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생활의 편익과 행정 처리를 돕겠다는 이유였다. 초기 주민등록번호는 12자리였지만 1975년 7월부터 현재처럼 13자리가 됐다. 당시 주민등록증 발급이 강제 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 주민등록증 발급이 의무화됐다.
한국처럼 전 국민에게 식별번호를 부여하는 국가는 중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싱가포르 등 8개국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어권 국가 대부분은 개인식별번호나 국가신분증 제도가 없다. 사회보장번호나 사회보험번호가 있지만 공개가 법으로 금지돼 있으며 일부 행정업무에만 사용토록 돼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국가신분증이 존재하지만 개인 고유 번호가 아니라 우리나라 여권처럼 신분증 자체에 매겨진 번호다. 따라서 신분증을 갱신하면 번호도 바뀐다. 일본은 무작위로 추출된 10개의 숫자와 1개의 오류 검정 숫자로 된 주민표코드가 있으며 스웨덴과 네덜란드는 개인확인번호가 있지만 행정부 내에서만 사용된다.
장성현기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