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삶도 모두가 허구…피할 수 없는 죽음
노인이 읊조린다.
"이 세상에 우리가 꿈꾸던 나라는 없었다." 그는 보안관이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황량하고 거친 서부에서 정의를 세우려고 한 보안관이다. 만년의 그는 이제 무기력하다. 범죄 없는 행복한 나라, 모두에게 공평하게 정의가 적용되는 나라, 악이 사라진 나라에 대한 꿈도 힘을 잃었다. 그 어떤 것도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만 노인의 녹슨 총자루에 내려앉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코맥 맥카시가 미국과 텍사스 국경을 배경으로 쓴 '국경 3부작' 중 가장 최근작을 코엔 형제가 영화화한 작품이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상을 휩쓸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폭력물이다. 그러나 품새는 상당히 철학적이고, 관조적이고, 운명론적이다.
보안관 벨은 노련하고 현명하지만 행동성은 약하고, 카우보이 모스는 소시민적인 욕망의 덩어리고, 해결사 칼슨은 자본주의의 화신이다. 모스의 아내 칼라는 남편을 믿고 따르다 결국 살해되는 그릇된 선택의 희생자다. 모두 현대 미국 구성원의 대표자들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안톤 시거라는 희대의 살인마다. 그는 전혀 살인을 저지를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굵은 눈은 처량하고, 칼 세운 진바지는 반듯하고, 단발형의 머리는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살해한다. 심지어 자신을 도와준 사람도 파리 목숨처럼 가벼이 죽여 버린다. 그가 보는 인간은 25센트짜리 동전과 다르지 않다. 생겨나고, 떠돌아다니다 결국 사라지고 마는, 어떤 존엄성도 없는 존재다. 죽음 앞에 선 모스의 아내가 묻는다. "이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이러지 말아야 할 필요는 뭐가 있나?
그는 동전의 양면 같은 필연, 우연 사이에서 스스로 운명을 결정짓는 운명의 화신이다.
그가 가진 살인 무기는 상당히 은유적이다. 그는 무거운 에어건을 들고 다니며 사람을 죽인다. 총은 칼에 비해 죽음의 죄책감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총알조차 없는 공기로 사람을 죽인다. 이마에 총탄 자국이 선연한데 총알은 없다. 공기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지만, 응축될 때 그 어떤 총탄보다 강력한 화력을 뿜어낸다. 그는 흔적 없이 슬그머니 다가오는 죽음의 화신이다.
화가 이영철은 피가 낭자하게 뿌려진 캔버스에 관찰자인 보안관을 그렸다. 그리고 각 모서리에는 주인공들의 이니셜을 달았고, 사방 화살표의 구속 아래 추락하는 인물은 존재의 허무를 나타낸다.
가장자리의 원형은 총알구멍, 동전, 신호등, 죽음을 시각화한 것이다. 죽음이란 동일한 상황에 이르지만 어느 하나도 똑같은 것 없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 원형은 시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단두대다. 존재를 소멸시키는 안톤 시거의 잔혹한 실체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빈틈없는 죽음의 과정을 걷게 되는 시간의 모습과 닮았다.
시인 노태맹은 "늙음은 지혜의 도가 되지 못한다"며 아예 "우리들의 나라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삶조차 허구라고 단정 짓고 우리들의 나라는 허구의 바다, 허구의 황금궁전으로 정작 우리가 없는 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고 뜨고 지는 해와 저 달이 뿜어내는 열역학 속에 작동되는 죽음 기계, 그 운명은 시계가 똑딱거리며 가듯이 생명도 그렇게 가고 만다는 필연성과 덧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
감독: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등급/상영시간:18세 관람가/122분
줄거리:사막 한가운데서 사냥을 즐기던 모스(조쉬 브롤린)가 총격전이 벌어진 듯 출혈이 낭자한 사건 현장을 발견한다. 모스는 물 한 모금을 갈구하는 단 한명의 생존자를 외면한 채 떠나다가 우연히 200만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발견한다. 횡재를 했지만 물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한 게 내심 꺼림칙했던 모스는 새벽녘에 현장을 다시 방문하게 되고, 때마침 마주친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여기에 200만달러가 든 가방을 찾는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사진)와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이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혼돈과 폭력의 결말로 치달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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