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힘이다]어머니께 신장 기증한 아들

입력 2008-05-01 07:08:18

'겨우 콩팥 하나'…어머니 사랑에 비할바 아니죠

경기도 양평 용주사로 나들이를 떠나 찍은 김순란(여
경기도 양평 용주사로 나들이를 떠나 찍은 김순란(여'59)'김시범(41)씨 모자. 19년 전 자신의 콩팥 하나를 어머니에게 이식한 김시범씨는 수술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어머니에게 다시 이식할 3번째 콩팥을 찾고 있다.(사진 김시범씨 제공)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 청송초등학교 앞 마을 주민들은 콩팥 이식 수술을 받은 김순란씨(여'40)의 쾌유를 손 모아 빌고 있다. 아들 김시범씨(22'영남대 4년)가 꺼져가는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콩팥을 떼어 내 어머니에게 이식한 눈물겨운 사연이기에 마을 주민들의 쾌유 소원은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1989년 4월25일자 매일신문에 실린 '콩팥 떼 드린 장남의 효성'이라는 미담 기사이다.

당시만 해도 콩팥 이식은 성공률이 매우 낮은 힘든 수술이었고, 아들이 어머니에게 이식한 보기 드문 사례였기에 주변의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올해 '가정의 달'을 맞아 그 모자의 행방을 찾아봤다. 여전히 아들과 어머니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지난 19년 세월은 한편의 드라마 같았습니다. 영남대 재학 시절 두번이나 콩팥 이식을 받은 어머니는 마침내 건강을 되찾으셨어요. 대학 졸업 후 직장(현재 서울보증보험 근무)도 잡아 어머니가 무척 기뻐 하셨죠. 그러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실패와 성공, 환희와 눈물을 연속이었죠. 다행히 어머니는 여전히 정정하시지만 수술만 10여차례 받는 고통을 겪으셨고, 지금도 일주일에 사흘은 병원신세를 져야 합니다."

19년 전 매일신문 보도 즈음의 모자는 눈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마을 주민들이 30만원의 성금까지 모았지만 수술 결과가 좋지 못해 아들의 콩팥 하나만 희생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아들 김시범씨는 "아직도 20cm가 넘는 흉터가 배에 남아 있지만 이식한 콩팥이 아무 기능을 하지 못했다"며 "어머니 혈관을 이식 콩팥 혈관과 더 넓게 연결하는 수술까지 했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열여덟에 아버지와 결혼, 3남매를 낳으셨어요. 젊어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3남매 모두 대학에 보내셨죠. 고생이 끝나려는 바로 그 순간 만성신부전증이 찾아온 겁니다." 그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새 콩팥을 찾기 위해 1년 휴학을 결심했고, 방방곡곡을 누볐다. 하늘이 아들의 효성을 알아차린 것일까. 1990년 마침내 기증자를 찾았고, 경북대병원에서 두번째 이식 수술이 이뤄진다. "넉달이 다 되도록 소변이 나오지 않아 두번째 이식 수술도 실패하나 싶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 속에 퇴원을 준비하던 어느 날 느닷없이 소변이 나오기 시작했죠. 병원에서도 기적이라 하더군요."

어머니와 아들은 그렇게 건강과 행복을 되찾았지만 시련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10년 넘게 잘 쓰던 콩팥이 3년 전 갑자기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 일주일에 세번, 1회에 4시간씩 그 지긋지긋한 혈액투석을 다시 받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김씨는 "어머니에겐 모두 4개의 콩팥이 있지만 하나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며 "남들은 잘만 이식에 성공해 평생 쓰는 콩팥이 왜 어머니에게만 예외가 되는지 너무 가슴 아프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 포기는 없다고 했다. "의사들은 3번째 콩팥 이식도 불가능하진 않다고 했습니다. 성공률은 낮지만 국내만 해도 수십명이 세번째 콩팥 이식수술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날로 당장 국립장기이식센터에 콩팥 이식 신청을 했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증자가 나타날 그날만 손 모아 기다리고 있어요."

김시범씨는 "어머니가 늘 약을 드시긴 하지만 아직 젊고 건강하시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며 "그렇게 힘드시면서도 아들을 향해 늘 "건강 조심하라"(콩팥하나 없으니까)고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