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내리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덫
나의 사지는 내 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잘 죽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너무 멀어서 끝은 보이지 않았다.(김훈, 부분)
달아공원에서 하얀 구름 사이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죽음을 생각했다. 지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슬픈 풍경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쓸쓸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이 너무 멀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통제사의 마음을 읽었다. 이제 한산도로 간다.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해전에서 통제사가 이끄는 조선함대는 단 한차례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둔 해전은 아마도 '한산도대첩'일 것이다.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앞세운 이른바 '학익진' 전법으로 73척의 왜선 중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하는 빛나는 전과를 거둔다. 이 전투 이후 통제사는 한산도에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또다시 다가올 전투에 대한 장기적인 대비에 들어간다. 1593년 7월부터 1597년 2월까지 약 3년 7개월에 걸친 시기는 통제사의 생애에서 개인적으로 그나마 가장 안온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반도 거의 전부가 왜적에 의해 유린된 상황에서의 일상적 편안함은 조선 권력 내부에서 자라고 있던 통제사에 대한 시기와 불안감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통영 여객선 터미널에서 파라다이스 카페리호 표를 샀다. 한 시간 간격으로 배편이 있어서 불편함은 없었다. 한산도 전체를 돌아볼 생각으로 차를 함께 실었다. 한산도로 가는 길은 제법 운치 있는 뱃길이다. 한려수도를 이루는 크고 작은 섬들이 사방에 점점이 흩어져 있고 남해 특유의 잔잔한 물살은 흡사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듯 유려하다.
통영항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배는 멀리 한산도를 그림처럼 앞두고 사방이 탁 트인 넓은 바다의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여기가 견내량의 왜군을 유인하여 학익진으로 무찌르던 그 곳이었을 것이다. 뱃전에 서서 눈을 감으면 그날 그 거대한 전투의 함성과 포성이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주변에는 미륵도, 거제도 등 큰 섬을 비롯해 화도, 서좌도, 송도, 추봉도 등의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한산도로 가는 뱃길에서 만나게 되는 관문은 이순신 장군이 화살을 만들기 위해 조성한 대밭이 있었던 죽도(竹島)와 장군이 갑옷을 벗고 전장의 피로를 씻었던 곳이라는 해갑도(解甲島)이다. 한산도에 가까워지면서 거북등대를 볼 수 있었다. 암초 위에 거북선 모형으로 만들어진 거북등대는 바닷물이 들어올 때면 암초가 바닷물에 잠겨버려 마치 거북선이 출진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뱃전을 부딪치는 바다 소리를 들으면서 를 다시 펼쳤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어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김훈, 부분)
통제사에게 있어서 칼이라는 사물은 통제사 내면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 통제사에게 있어서 아군이든 적군이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덫이었던 셈이다. 겉으로 드러난 적이 존재해야 오히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지니는 상황. 그게 전쟁이다. 보이는 덫은 칼로 내리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덫을 칼로 내리칠 수는 없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칼로 내리칠 수 없는 덫이었다. 마음껏 덫을 향해 칼을 내리칠 수 없었던 통제사의 칼의 노래가 한없이 쓸쓸했다. 시원한 여름 바닷바람이 가슴으로 달려들었지만 전혀 후련하지 않았다. 오른편 산꼭대기에 전승기념탑이 보이고 한산도가 빠르게 눈앞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제 한산도이다.
결결이 일어나는 파도/ 파도 소리만 들리는 여기/ 귀로 듣다못해/ 앞가슴 열어젖히고/ 부딪혀 보는 한산섬 바다!// (중략) 들어도 들어도/ 알 길 없는 설법일러니/ 소리로 빛깔로 속속들이 베어들어/ 어느 새 살 되고 뼈 되고/ 피 되어 솟는 한산섬 바다!(이은상, 부분)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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