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구미 인동동 제13통 통장 박정일씨

입력 2008-04-28 07:51:04

구미2공단 이주민 21년째 지킴이

"나는야 오늘도 자전거로 동네순례를 시작한다네."

오전 7시면 구미 인동동 제13통장 박정일(67)씨가 콧노래를 부르며 마을 순회에 나선다. 변함없는 그의 동반자는 태극기와 산불조심 깃발을 매단 자전거. 박 통장은 자전거에만 올라타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오실땐 단골손님 안오실땐 남인데…." 수십년 동안 흥얼거려온 18번 곡이다.

박 통장은 "아침에 눈을 뜨면 동네를 한바퀴 휘휘 돌아보고 와야 밥맛이 당긴다"고 한다. 밤새 마을에 무슨일은 없었는지?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둔 곳은 없는지? 꽃과 나무들은 가뭄을 타지 않았는지? 이것저것 빠트리지 않고 챙겨본다.

"하하하! 우리 동네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지요.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니까…." '자전거 통장'은 동네일이라면 항상 신바람을 낸다. 20여년 전 통장으로 임명된 후 한결같이 "통장은 나의 천직"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흉사에는 당연히 단골손님이다. 일찌감치 이웃들과 더불어 봉사하며 살아가는 묘미를 터득했다. 그럭저럭 20년 세월. 그는 별명이 '황상동 고을원님'이다. 박 통장은 그러나 척추장애 3급 장애자다. 거동이 다소 불편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사람들보다 이웃을 위한 봉사정신은 더 강하다. 그래서 '작은거인'으로도 불린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3월 5일 13통 통장을 맡은 후 21년째. 젊은 시절엔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평생 뚜렷한 직장생활을 해보지 못한 박 통장에겐 동네주민들이 '통장님'이라고 불러주는 말이 너무 듣기가 좋았다. 그래서 처음 통장으로 임명된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동안 마을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구미공단이 들어서기 전에는 조그마한 촌락에 불과했던 인동동이 지금은 도내에서 단일 읍면동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박 통장은 인동동 60명의 동료 통장 중 최고 왕고참이다.

박 통장의 고향은 황상동에서 구포동으로 넘어가는 돌고개 너머 예쁜 솔밭이 있던 솔뫼마을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살다가 5세 때 귀국해 '솔뫼마을'에 정착했다.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으나 어릴때 유난히 잔병치레를 많이 해 초등학교도 열세살때 곧바로 2학년으로 들어가 18세때 졸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삶에 좌절해 본 적은 없다. 늘 희망을 가지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는 인동지역의 유명인사다. "어허허! 박정일 통장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지." 스스로도 인정한다. 그가 지키는 마을은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박 통장이 38세때인 79년. 솔뫼마을이 구미 2공단 조성사업에 편입되면서 마을전체가 사라졌다. 당시 공단에 편입된 가구는 모두 70가구. 주민들은 고스란히 인근지역인 황상동 이주마을에 정착했다. 함께 살던 주민들이 모두 이주마을로 옮기는 바람에 이젠 아무개집의 부엌살림까지 일일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훤하다.

"최근에 젊은 사람 2가구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72가구가 됐는데 새 주민들도 동네주민들과 잘 지내고 있어요." 박 통장은 소탈한 성격이라 주민들과 인사하는 목소리도 언제나 낭랑하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지만 얼굴은 아직도 동안이다.

그러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파다. 더러는 직선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다함께 잘해 보자고 하는 말이어서 아무도 불쾌해 하지 않는다. 오후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꼭 동네 노인정을 찾는 일도 주요 업무 중의 하나다.

손에는 음식봉지가 빠지지 않는다. 어르신들을 위한 소주와 술안주감이다. 경로당 2층에 있는 마을 공부방도 들여다 봐야 한다. 종종 학생들에게 간식도 제공한다. 어린시절 몸이 불편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통장생활 21년 동안 모범통장 표창도 많이 받았다. 작년에는 경북도 도정 민간인 유공 표창도 받았다. 지난 1월에는 결국 큰 보상을 받았다. 인동새마을금고 부이사장에 무투표로 당당히 당선된 것. 그래서 요즘은 더 살맛이 난다.

그는 스물셋에 결혼해 1남1녀를 두고 있다. 88세된 노모도 극진히 모시고 산다. 박 통장은 올해가 구미시 시승격 30주년과 이주마을 입주 30년째인 점을 감안해 기념잔치를 한판 벌일 요량이다. "우리 13통 이주마을 주관으로 인근 주민들을 초청해 조촐하게 음식이라도 나눌 생각"이라며 "시장님도 초청하려고 하는데 과연 와 주실까요?"라며 웃는다.

박 통장은 12일 구미시가 낙동강변에서 개최한 '시민 인라인, 자전거 축제 및 한마음 시민걷기대회'에도 분신인 자전거를 끌고 당당히 참가했다. 수백대의 자전거 대열속에 태극기와 산불조심 깃발을 펄럭이는 박 통장의 자전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구미·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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