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을 꿈꾸는 남편을 둔 아내의 삶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04년∼1866년)는 위인전에 자주 등장하는 조선의 지리학자다. 김정호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아내를 생각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남편이 지도제작을 위해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침이 밝아올 때, 해가 지고 새들이 제 집을 찾아 숲으로 날아들 때, 석양이 붉게 물들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가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하얀 젖니가 솟아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누구와 그 가슴 벅찬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을까. 그녀는 남편의 업적을 오늘날 우리처럼 자랑스러워했을까?
그녀는 밥짓고 아이 낳고, 밭 갈고 씨앗 뿌리고, 남편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돈도 명예도 밥도 되지 않을 남편의 지도제작을 증오하지는 않았을까?
김정호는 지도제작을 위해 제 길을 갔다. 비록 남루했지만 그의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고 각오했던 일이니까. 그러나 원하지도 각오하지 않았던 삶과 마주서야 했던 그의 아내는 어땠을까?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에는 김정호의 아내와 닮은 여성이 등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실이며 남편 손에 자식 잃고 자신도 살해당한 사람이다. 츠루히메 혹은 츠키야마 부인으로도 불리는 이 여자의 슬픔은 이에야스의 명성에 가려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케다 신겐과 더불어 일본 전국시대 최강이었던 슨푸성 성주 요시모토의 외조카였다.
츠루히메는 스무 살 때 여섯 살 아래인 이에야스와 결혼했다. (결혼 나이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에야스는 결혼할 당시 열 네 살이었다. 소설 '대망'에는 츠루히메가 이에야스를 막무가내로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나오지만 아닐 것이다. 스무 살 먹은 여자가 열네살짜리를, 그것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기 성(城)도 없는 볼모 신세의 꼬마를 좋아했을까? 그녀의 결혼은 다분히 삼촌인 요시모토의 정략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녀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이때부터다.
츠루히메는 태어나고 자란 슨푸를 사랑했고 거기서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첫 출전에서 슨푸를 배신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슨푸성에 머물고 있는 처자식이 죽든 살든 개의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츠루히메와 아이들은 슨푸를 떠나 이에야스의 성에 도착한다.
전국통일의 대망을 꿈꾼 이에야스는("그에게 대망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에야스가 다만 운 좋게 오래 살았기 때문에 전국통일의 마지막 열차를 탔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첩을 들였다. 그에게는 이름이 알려진 첩이 열다섯이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첩들도 많았다.
츠루히메는 소박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녀는 남편을 방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 머리채를 다듬고 화장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딴 데를 보았다. 정실인 그녀를 두고 다른 여자를 내전에 앉혔다.
츠루히메는 남편이 자신의 고향이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신 슨푸성과 전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전국시대의 맹주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이에야스는 자식마저 죽였다. 츠루히메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아내 츠루히메 마저 다케다 가쓰요리 군대에 매수된 요시로와 밀통하고, 반란음모를 꾸몄다며 죽였다. 츠루히메가 요시모토의 조카딸인 만큼, 요시모토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를 증오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츠루히메는 난세를 종식할 전국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가의 안녕, 자식의 생존, 남편과 식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바랐다. 그러나 야망(혹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이에야스는 아내의 소박한 바람을 짓밟았다. 그는 소박한 바람을 털어놓는 아내에게 '지금은 난세다. 어린애 같은 생각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황야로 떠나고 싶은 사람과 정착을 원하는 사람은 화해하기 힘들다. 정착을 원하는 아내는 '남편을 위해 거울 앞에 앉지만' 황야로 떠나고 싶은 남편은 아내가 아니라 '창 밖'을 본다. 두 사람의 불행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노마드는 노마드끼리, 정착민은 정착민끼리 공감하고 소통할 뿐이다. 츠루히메와 이에야스는 다만 잘못 만났을 뿐이다.
이문열은 그의 소설 '변경'에서 어머니 뱃속에 자신을 남겨 두고, 이상을 좇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정액 한 방울'로 묘사한다. 남은 자에게 떠난 자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인연 맺지 마시라. 적어도 상대와 내가 노마드인지 정착민인지 정도는 구분해야 한다.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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