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까지 내놨는데…지방민이 노리개냐"
정부의 혁신도시 재조정 방침이 알려지자 대구 신서동과 경북 김천 혁신도시 예정지 주민들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역균형발전 방침에 따라 토지 수용 등에 적극 협력했는데 인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얘기다. 신서동과 김천 혁신도시 예정지 현장의 민심을 들어봤다.
17일 오후 대구 신서혁신도시 예정지인 각산동의 한 마을. 토지보상을 받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마을에는 어수선한 기운만 감돌았다. 마을 입구에는 '혁신도시개발 반대' 플래카드와 '대토(代土) 알선'이라는 부동산 광고문구가 여기저기 나붙어 있을 뿐, 을씨년스러웠다.
사람이 빠져나간 집들은 유리창이 깨지고, 쓰레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농작물 경작 금지'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마을 상황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토지공사에 따르면 신서혁신도시의 토지보상률은 63%. 이미 많은 사람이 고향 땅을 내주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옮긴 후다. 보상협의를 마무리 짓지 못해 남아있는 마을 주민들은 마지막 싸움을 하고 있지만 일주일 전 이의제기에 대한 토지공사의 최후통첩을 받은 상태였다. 이삿짐을 싸는 주민도 있었다.
정부의 '혁신도시 재검토' 방안에 해당 지자체들이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남은 주민들은 실망감을 넘어 할말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돼지 축사를 운영하는 한 주민은 "돈 몇푼 쥐여주고 주민들 다 내쫓아 놓고, 한다 만다 하니 어처구니없다"며 "형편없는 보상금을 받고 쫓겨나느니 차라리 텅빈 마을이라도 지키고 싶다"고 했다.
정작 정부의 '혁신도시 재검토' 방침에 떠들썩한 것은 예정부지 경계선 너머였다. 신서동을 비롯한 혁신도시 인근 부동산마다 혁신도시의 도시계획도가 벽에 커다랗게 내걸려 있었다. 대구의 낙후지역에 혁신도시가 들어선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생겨난 게 부동산업소였고, 전국에서 투기꾼들도 몰려들었다.
S부동산 관계자는 "혁신도시 계획이 추진되면서 지난해까지 무서울 정도로 땅값이 치솟았다"며 "혁신도시 규모가 줄거나 계획이 다소 수정되면 또다시 부동산 경기가 요동을 치지 않겠느냐"며 걱정했다.
기대 심리는 땅값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지하철 각산, 안심역 인근은 3.3㎡(1평)당 600만원하던 땅값이 1천700만원까지 뛰었다.
불안심리는 인근 주민들에게도 퍼져 가고 있었다. 각산동의 아파트 주민은 "지난해 109㎡(33평)형 아파트를 1억9천만원에 팔라는 권유에도 혁신도시가 만들어지면 더 오를 것 같아 팔지 않았는데, 이제는 폭락하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신서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이미 급등한 가격 탓에 토지 거래는 실종됐지만 혁신도시 인근에 뒤늦게 토지를 산 투자가들은 정부가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노심초사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경북혁신도시가 들어설 김천 농소면과 남면 일대에는 '올해부터 영농이 금지된다' '공사에 앞서 이주대책부터 세워라'는 등의 각종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또 혁신도시 예정지내 광활한 전답은 본격 공사가 진행되지 않아 잡풀만 무성한 채 폐허처럼 변해 있다.
다만 야산 곳곳에서는 분묘 이장작업이 한창이고 포도 비닐하우스 철거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9월 1공구 착공과 함께 농사가 전면 중지된 상태에서 늦은 공사 진척에 정부의 혁신도시 재검토 방침까지 겹치자 주민들은 원성을 쏟아냈다.
남면 용전1리 박길하(61) 이장은 "문전옥답을 강제로 수용하면서 농사마저 못 짓게 하더니 공사를 제때 진행하지 않아 쓸모없는 땅이 되었다"며 "차라리 올해 농사라도 짓게 했으면 소득이라도 올렸을 것 아니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 다른 주민은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느닷없이 혁신도시 재검토 얘기를 꺼내고 축소 입장을 밝히는 것을 보니 본격 공사는 계속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결국 애꿎은 농민들만 농토를 잃고 무너진 억장을 쓸어내리고 있다"고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과수원 9천900㎡(3천평) 농사를 짓던 김재근(47)씨는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국책사업 명분에 따라 보상에 응했지만 '재검토' 얘기를 접하고 보니 열불이 터져 밤잠을 설쳤다"며 "평생 일궈낸 과수원이 순식간에 황폐화되는 것도 참기 어려운데 정부에서 국민을 우롱하고 기만하고 있다"며 목청을 높였다.
78세와 73세 노부모와 함께 이주를 해야 하는 남면 용전2리 박희동(48) 이장은 이주문제 고충을 토로했다. "당초 토지 소유자들에게는 혁신도시내에 건설되는 아파트를 조성원가의 70% 분양가로 공급하겠다고 토지공사 측에서 약속해 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혁신도시 계획이 대폭 변경되면 이주대책은 어떻게 되느냐"고 반문했다.
용전2리 마을 35가구 중 현재 2가구만 외지로 이주했고 대부분 농가들은 혁신도시내에 건설되는 아파트나 단독택지에 입주할 계획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혁신도시 계획이 변경되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공통된 이야기이다.
연일 대책회의를 열고 있는 박세웅(52) 주민대책위원장은 "김천 발전이라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주민들이 소중한 삶의 터전을 잃는 희생을 감수해 왔다. 혁신도시 건설사업이 축소되면 전국 10개 혁신도시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천·강병서기자 kb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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