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땅 가야산](40)독용산성

입력 2008-04-14 07:13:02

사도세자의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正祖). 그는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수원 화성(華城)을 쌓았다. 지극한 효심으로 축성된, 근대 성곽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화성은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나아가 당쟁이 극심했던 나라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의 원대한 꿈도 담겨 있다.

또한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들이 총결집된 것도 주목을 끈다.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제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축성에 참여했다. 기능성과 과학성, 예술적 아름다움까지 갖춰 조선시대 절정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정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 '이산'의 영향으로 수원 화성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

성(城)은 인간이 쌓아 올린 대표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특히 산이 많고 외적의 침략을 자주 받은 우리나라에선 성을 쌓고 유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성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땀과 눈물, 이야기들이 스며 있다.

가야산 중턱에 있는 '가야산성'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산성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독용산성'이다. 독용산성이란 이름은 독용산(禿用山·955.5m)에서 유래됐다. 산성은 김천 대덕산에서 가야산으로 뻗어 내려온 줄기인 독용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와 금수면의 봉두리, 무학리, 영천리에 걸쳐 있으며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고구려를 비롯해 우리 조상들이 쌓은 성의 대부분은 산성(山城)이다. 이 산성이 어떠한 구조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포곡식, 테뫼식, 복합식 산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독용산성은 이 가운데 포곡식 산성에 해당한다. 성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包容)해 축성된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릉(山陵)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형태다. 테뫼식 산성(머리띠 산성)은 산의 정상 부근에 머리띠를 두른 듯이 쌓은 것을 일컫는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해 그 주위에 성벽을 두른 모습이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아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에 많다. 복합식 산성은 흔하지 않은 형태로, 태뫼식과 포곡식을 혼합해 축성된 것이다.

독용산성을 찾아가는 데엔 두 길이 있다. 성주댐 수문 아래에 있는 중산마을을 통해 독용산으로 올라가거나, 가천 금봉리 시어골에서 독용산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산성의 둘레는 7.7km(평균 높이 2.5m, 평균 폭 넓이 1.5m)로 영남지방에 구축한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산성 발견

독용산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출토유물 등으로 미뤄 1천500여년 전인 5세기쯤 성산가야에서 처음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산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 독용산성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 동안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던 것.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략을 피하던 백성들에 의해 독용산성이 발견됐고, 그 가치가 새삼 주목을 받게 됐다. 나라에서는 산의 형세가 험해 병란을 피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판단하고, 숙종 원년에 성을 개축하기 시작해 그 다음 해에 완성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독용산성 개축에 대한 여러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992년에는 대구대박물관에 의해 독용산성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뤄졌다. 그에 따르면 성안 면적은 1.175㎢이며 성벽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잘라 축조했다. 일반적인 석(石)산성과 같이 아래엔 큰 돌을 놓고 점차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크기의 성돌을, 자연석 상태로 외벽을 면에 맞춤한 막돌 흩은층쌓기를 했다. 사이사이의 공간에는 잔돌끼움쌓기를 해 성벽의 틈새를 메우는 형태로 되어 있다. 계곡을 지나치는 성벽의 경우에는 단(段)을 지워 성벽쌓기를 해 급경사에 따른 성벽의 붕괴를 막도록 했다.

지금은 성문·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무너지고 없어져 돌무더기와 그 옛터로 짐작되는 건물지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개축할 당시 독용산성은 둘레가 4천581보(步)이고, 여장(女墻·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을 일컬음)이 2천405첩(堞)에 이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동옹성(東瓮城), 장대(將臺), 동서남북의 네 포루(砲樓), 동문(東門), 수구문(水溝門), 남소문(南小門) 등이 있었으며 합천과 거창의 군병 등을 배속하는 등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성을 관리하기 위해 객사(客舍), 동·서 창고, 군기고(軍器庫) 등의 건축물이 갖춰졌지만 조선말기 군사적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돼 성곽과 시설물들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가야산과 성주댐 등 빼어난 절경!

독용산성 안에는 절을 비롯해 여러 건물이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터는 안국사지(安國寺址)다. 기록에 따르면 안국사 외에도 보국사(保國寺), 진남사(鎭南寺)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안국사지를 제외한 다른 절터는 찾을 수 없다. 절의 이름에 나라를 지키려는 뜻을 담은 것이 흥미롭다. 안국사지는 경작에 의해 유구(遺構)가 거의 사라져 버렸으며 주초석(柱礎石)은 매몰되어 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산성 안에 사찰이 있었던 것은 주로 승군(僧軍)이 있어 주둔병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임진왜란을 계기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승군들이 전투가 없을 때는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던 전례를 볼 때 독용산성의 개축과정과 방어에 이들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안국사 등에 거처하는 승려들은 독용산성의 유지 및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성곽과 문루를 복원한 독용산성의 동문을 들어서면 5기의 비석으로 이뤄진 비석군이 보인다. 크기는 각양각색이나 모두 독용산성이 개축된 이후 수성(守城)에 관계했던 관리들을 기리는 선정비들로 산성안에 산재해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독용산성은 얼마 전부터 성주군에서 보수를 시작해 지금은 홍예형(虹霓形·무지개)의 동문과 문루를 복원하고 주변 성곽의 일부와 동치성(東雉城)을 보수했다. 옛 독용산성의 모습을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어 매우 반갑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성문과 성곽의 웅장한 모습은 찾는 이로 하여금 독용산성의 위용을 일부나마 가늠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성문의 문루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면 가야산 등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이 확 트인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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