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이 멀지 않은데 남 보기엔 철 덜 든 것 같죠"
"너 언제 철 들래 하며 누군가 물어보길래. 대체 그 무거운 걸 왜 드냐고 낄낄거렸다." 가수 싸이는 조덕배와 함께 부른 노래 '어른'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나이 60을 바라보는 치과의사 임무영은 '자신있게' 말한다. "난 아직 철이 덜 들었어." 원고지 몇장으로 한사람의 인생을 말하는 것은 알파벳 외우고 영어 다 배웠다고 말하는 셈이다. 임무영을 만난 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두차례 만나 7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현듯 글 쓰기가 겁이 났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속내를 다 이야기하는 걸까?' 돌아와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들은 대로 쓰는 수밖에 없겠다며 컴퓨터를 켰다. 철없는 말총머리 치과의사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돈을 원없이 벌어봤다.
그는 1952년생이다. 만 56세. 머리가 길다. 약간 곱슬인데다 어깨 아래까지 머리가 길었으니 약간 풀어진 파마머리를 질끈 묶어놓은 모양이다. 아무튼 머리 기른 사연이 재미있다. 몇해 전 전날 술을 잔뜩 마시고 몽롱한 가운데 이발소에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른바 퇴폐 이발소. 안마한답시고 몸을 비벼대는데 눈을 떠보니 남자 안마사였다나. 그때부터 이발소를 끊었단다.
그는 혼자 산다. 팔공산 초례봉 자락에 집 지어놓고 사냥개 20마리와 함께 산다. 동국대 객원교수로 있는 아내는 시내 아파트에 산다. "왜 별거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별거는 무슨. 그냥 사는 방식이 다른 거지"라고 답한다. 비 오는 날은 승용차로, 맑은 날은 오토바이로 출퇴근한다. 승용차는 '포르쉐 카이엔 터보'. 세금 포함하면 웬만한 아파트 한채 값이다. 오토바이는 'BMW HP2'. 역시 세금 포함하면 그랜저 한대 값을 훌쩍 넘는다.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말총머리 휘날리며 산악용 오토바이로 팔공산을 오르는 모습은 실제 보지 않는 이상 상상이 쉽지 않다. 지금까지 '부숴먹은' 자가용만 수십대는 될 거라고 말하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는 돈이 많다. 사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수성구 두산동에 7층짜리 건물이 2채나 있고, 팔공산 자락과 청도를 합쳐 수만평 땅, 도심 아파트와 전원주택까지 있으니 부자는 맞다. 그 역시 "돈은 원없이 벌어봤다"고 말한다. 지난 1984년 대구 팔달시장 근처에서 첫 개원을 했다. 개원 직전 대구 국군통합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할 당시 월급이 30만원 정도. 그런 그가 개원 첫 달 번 돈이 1천500만원. 점심도 못 먹을 정도로 환자가 몰려들었다. 과연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싶어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집에 돈자루를 들고와서 장롱에 채워놓고는 자리가 모자라 꾹꾹 밟아도 보았고, 돈다발을 방바닥에 뿌려놓고 즈려밟고 다녀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빚이 15억원이다.
◆나는 폭력 전과가 있다.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서는 하도 숙제도 안 하고 말썽을 부려서 종아리와 손바닥은 6년 내내 선생님 차지였다. 초교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을 못 외웠다. "중학교에 갔는데 아버지가 그 학교 선생님이셨거든. 공부 못하면 쪽팔리니까 어쩔 수 없이 했지. 전깃불도 없었는데 정말 치열하게 했어. 전교 1등을 하니까 아버지가 교동시장에서 새 남포등을 선물로 사 주더라고."
그는 고려대 의대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하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신기하다. 당시 약국에서 파는 각성제가 있었는데, 10알씩 한꺼번에 먹으면 마치 마약처럼 몽롱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교내 서클 회장이던 그는 경쟁 서클 아이들이 먹는 것을 보고 호기심 반 경쟁심 반으로 직접 먹어봤다. 결과는 무기정학. 대구에서 재수 학원을 다녔다. 대구형무소가 도심에 있던 시절. 시내 학원 건물에서 내려다보면 재소자들이 마당에서 체조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이 저런 곳에 갈까?'하고 늘 궁금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그곳에 가게 됐다. 그는 전과자다. 사는 형편이 괜찮았던 아버지는 어려운 학생들을 많이 도왔고, 그런 친구 중 하나가 대구에 살고 있었다. 돈이 필요했던 그는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되레 친구는 아버지를 욕했다. 그는 "너 같은 놈은 맞아야 정신 차린다"며 마구 두들겨 팼다. 검사가 "무슨 마음으로 때렸냐?"고 묻자 그는 "죽이려고 때렸다"고 답했다. 자칫 살인미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어이가 없던 검사는 단순 폭행으로 처리했고, 그는 대구형무소 '깜빵'에서 석달 넘게 살았다. "할 일이 뭐 있어? 공부나 했지. 9월쯤에 나왔는데 바로 대입시험을 쳐서 치과대학 간거야."
◆나는 치열하게 살아왔다.
경희대 치대에 진학한 그는 결혼을 했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동갑내기 아내는 국악예술고를 졸업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농사 지을 땅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생 일곱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젖소를 키웠다. 마침 태릉 근처에 땅을 조금 사둔 게 있어서 축사를 지을 수 있었다. 젖소를 키우며 대학생활을 했지만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는 치열하게 살았다.
수성구 두산동에 병원 건물을 지을 때도 그랬다. 친구에게 땅을 좀 알아보라고 맡겨놓았는데 나중에 찾아가 보니 허허벌판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것도 운명이려니 하고 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7층짜리 건물 하나 짓는 데 3년 걸렸다. 당시만 해도 사람 구하기가 힘들던 시절이었는데, 일당을 받아든 인부들이 돈을 다 쓸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대구형무소 시절 알게 된 건달 친구에게 부탁했다. "네 후배들 힘깨나 쓰지? 우리 병원 짓는데 일 좀 하라고 해라." 새벽마다 현장에 나와 작업 지시하고, 진료를 마친 늦은 밤이면 다시 현장에 돌아와 벽돌을 지고 날랐다.
◆나는 스피드를 미치도록 사랑한다.
그는 여행을 좋아한다. 언젠가 4박 5일 일정으로 홍콩을 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거기서 냅다 유럽으로 튀었다. 그는 여행을 가면 호텔에서 묵지 않는다. 길 가다 텐트를 치기도 하고 민박을 얻어 지내기도 한다. 그렇게 집에 전화 한통 없이 45일을 보냈다.
그는 스피드광이다. 죽을 뻔한 사고도 많았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 단 한대뿐이던 미국산 스포츠카 '콜뱃'을 샀다. 당시 차값만 1억원 정도. 1년 반 만에 폐차했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뒤집혔는데 수리비만 7천800만원이 나왔더란다. 지난 1979년 포니를 시작으로 웬만한 국산차는 다 타봤다. 지금 타고 다니는 포르쉐는 그가 30년을 꿈꾸던 차다. "내가 큰돈은 안 아껴. 그런데 물값, 전기값은 허투루 쓰는 걸 못 봐. 명품 옷은 한번도 사본 적이 없지만 자동차만큼은 돈을 안 아껴. 이번 자동차도 리스로 구입한 거야. 목숨과 직결된 건데 어떻게 아무 거나 살 수 있어? 그런데 기름값이 비싸서 오토바이를 주로 타. 하하하."
그는 사람을 잘 믿는다. 배신하지 않는 이상 그는 뱃속까지 내보일 정도로 믿는다. 행여 자신을 실망시키더라도 두번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세번째에는 가차없다. 그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고 했다. 사람을 좋아했지만, 사람들도 그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제 사람이 싫어졌다.
주위 사람들이 힘들다는 소리를 하면 그는 가만히 보지 못했다. "생전 연락 없던 녀석도 친구라고 찾아와서 푸념을 늘어놓으면 가만 볼 수가 없어. 형편 닿는 대로 도와주면 그걸로 끝이야. 돈 빌려줬다가 떼인 것만 모아도 빌딩 몇채는 샀을 거야." 평생 살아오면서 빚 없이 살아본 적이 딱 한달뿐이었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벌어봤지만 투기를 한 적도 없었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는 돈도 안 받았다.
그는 술을 입에 대면 오전 3, 4시까지 마신다. 안주도 안 먹는다. 안주까지 먹으면 술이 너무 안 취해서 지루하기 때문이란다. 담배는 하루 서너갑을 피웠다. 그런 그가 7년 전 산으로 올라가면서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다. 사람이 미워지고 신물이 났다. 그렇게 믿었건만 그렇게 자꾸 배신당하는 자신이 밉기도 했다. 요즘도 금요일 저녁이면 산에 올라가 모든 연락을 끊고 산다. 사람에 데인 상처는 치유가 안 된다. 물론 지금은 친구를 만나고 후배를 만나면 가끔씩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도 한다. 또 담배도 피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깊은 정을 주지 않는다. 행여 그 믿음이 배신당할까봐 무섭다고 했다.
"난 내성적인 사람이야. 거짓말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면전에 놓고 말을 못해. 그게 치밀어 오를 때면 도로를 달려. 미친 듯이 질주하고 나면 내가 언제 화가 났나 싶을 만큼 싹 가라앉아. 그러니까 아직 철이 덜 들었지."
아직 그는 꿈이 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도대체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앉았는지 알고 싶단다. 그러고 나면 팔공산이든 청도든 요양원을 짓고 불쌍한 노인들 도우며 살 거란다. 자기도 거기에 방 한칸 얻어서 그렇게 살다가 죽겠다고도 했다. 재산은 한푼도 누구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 "인생이 뭐 있어? 돌아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참 치열했다 싶기도 하고. 복지법인 만들어서 사회에 다 돌려주고 갈 거야."
그는 새벽마다 산에 오른다. 아침이며 저녁은 직접 지어 먹는다. 병원에서 먹는 점심은 미숫가루 한잔이 전부다. 땅을 고를 때엔 직접 포클레인을 운전하고, 돌을 나를 때엔 직접 경운기를 몬다. 값 비싼 수입차를 운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그것도 내 모습이고, 포클레인 모는 것도 내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는 모습이 정의되지 않는 사람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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