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⑤향수

입력 2008-04-12 07:57:30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후 마지막까지 남아 괴롭히는 것이 그(그녀)의 냄새라고 했던가.

시신경에 박혀 있던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혀끝에 감도는 촉감마저 아련해지지만 냄새는 끝까지 기억의 끈을 놓지 않는다.

냄새는 욕망이다.

꿈틀거리는 사타구니에서 풍기는 시큼하고 비릿한, 원초적 본능 같은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남녀들이 옷을 벗어던지고, 육욕의 향연을 벌인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질펀한 욕망의 시각화다.

지문처럼 냄새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게 볼 때 냄새는 곧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

'향수'는 1985년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할리우드식 스릴러와 달리 독일문학다운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스릴러다. 대표적인 것이 냄새를 정체성과 연결시킨 설정이다.

죽음의 화신, 그루누이는 냄새가 없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더라도 곧 죽고 만다. 썩은 생선 내장 더미에 그를 출산한 어머니도 곧 교수형당하고, 그를 팔아넘긴 보호소 대모며, 그에게 향수 제조법을 가르친 향수제조사도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그가 다가가도 여인은 알아채지 못한다.

냄새가 없다는 것, 존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굴 속에서 자신에게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그는 태어나서는 안 될 운명이었고, 태어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죽어도 기억해주는 이가 없었다. 마치 향수와 같은 존재다. 세상에 없는, 그러나 수킬로미터 밖에서도 털을 부들부들 떨며 날아드는 유혹의 페르몬인 것이다.

냄새는 이미 몸을 떠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사물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실체하는 은유의 대상이다. '코'라는 직접적 대상을 제목으로 한 문인수의 시는 '몸을 떠난 이름'을 쓰고 있다. 꽃의 냄새가 이미 꽃을 떠났듯이, 여인의 향기는 이미 여인의 떠난 것이다. 그래서 채집하듯 여인의 목숨을 거두지만, 그루누이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살인은 향수를 제조하는 비커나 깔때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화가 이영철은 화폭 가득히 원색적인 색으로 채우고 있다. 붉은 죽음의 향기가 위쪽에서 흘러내리고, 아래에서는 노란 자두를 팔던 여인의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다.

그림에는 숫자들이 암수표처럼 박혀 있다. 1738년 7월 17일 5번째 사생아로 태어나 13세 때 고아원을 나와 10프랑에 흥정되다 결국 7프랑에 팔려가 하루 15, 16시간 중노동을 하던 그루누이의 삶이다.

컬러의 조각들로 알파벳 'P'를 꼴라주했다. 다채로운 인간의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낸 향기(Perfume)라는 뜻이다. 단속(斷續)적으로 묘사된 것은 그 자체의 본질이 덧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림에는 두 가지의 피가 흐른다. 흰 피는 아래로 흐르고, 회분홍빛 피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른다. 흰 피는 아름다움에만 눈이 먼 그루누이의 섬뜩하리만치 순수한 열정을 뜻하고, 회분홍빛 피는 그래도 용납할 수 없는 원죄, 탁하게 오염된 피를 뜻한다. 본연의 붉은 피에 그루누이의 흰 의도가 뒤섞여 만들어진 피다.

화가는 "두 피가 교직(交直)되는 것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이상과 현실, 욕망과 피의 대가, 죽음을 껴입고 덧칠되는 삶의 모순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그루누이는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산화한다. 욕망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눈물 한 방울만 남기고 아무 형체도 없이 증발해버린다.

그 눈물은 '장미 백만 송이를 따 끓여낸 영롱한' 향수다. 시인은 그 눈물이야 말로 진정으로 번지는 영혼의 향수라 이름한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향수(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2006)

감독:톰 튀크베어

출연:벤 위쇼, 더스틴 호프만

러닝타임/등급:146분/15세 관람가

줄거리:18세기 프랑스. 악취 나는 생선 시장에서 태어난 그루누이(벤 위쇼)는 천부적인 후각의 소유자다. 그러나 죽음의 화신이다. 난생 처음 파리를 방문한 날, 한 여인의 매혹적인 향기에 끌린다. 그리고 그 향기를 소유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향수의 낙원이라 불리는 그라스(프랑스 남동부 지역)에서 본격적인 향수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그루누이. 그러나 그라스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잇따라 나체의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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