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ETRI 지방 밀착…대구 R&D 역량 위축 우려

입력 2008-04-11 09:26:24

▲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30년 역사상 처음으로 10일 대구테크노파크에서 경영전략회의를 열고 지방기업에 대한 연구기능강화를 천명했다.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30년 역사상 처음으로 10일 대구테크노파크에서 경영전략회의를 열고 지방기업에 대한 연구기능강화를 천명했다.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구세주인가, 포식자가 될 것인가.'

국내 최대의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10일 오후 대구테크노파크와 경북테크노파크에서 핵심 간부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영전략회의'를 열었다. 이는 30년 역사의 ETRI가 지방에서 개최하는 첫 간부회의였다. 이에 앞서 ETRI는 지난 2일 지역 기업들을 대상으로 ETRI 보유 기술 실용화 개발 및 공급을 위한 협의회를 가졌다. 또 시도와 ETRI 대구분원 설치도 협의하고 있다.

ETRI는 대구시, 경북도의 요구도 있었지만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 시절부터 부쩍 대구권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지역에서 ETRI의 R&D 역할증대가 무턱대고 반가운 것은 아니다. 지역 R&D 기관들은 대부분 설립초기 단계여서 연구분야를 개척하는 단계이고 ETRI가 지역 기관들의 R&D분야에 파상공세를 펼칠 경우 자칫 지역의 R&D 역량이 크게 위축될 수도 있다는 것.

◆공룡기관 ETRI의 지방 앞으로

ETRI는 인력만 1천964명, 지난해 5천609억원의 예산을 쓴 거대 R&D 기관이다. 지난해까지 819건의 국제특허, 1천45건의 국제 표준 및 100건의 국제표준 특허를 갖고 있다. 또 기술사업화 실적도 나머지 모든 정부 출연기관의 실적을 합친 것보다 2배에 이른다.

ETRI는 1985년 3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한국전기통신연구소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통합한 정부출연 연구기관. 첨단 정보통신 기술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 한국 경제성장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 정보통신 국책연구기관이다.

현재 ETRI는 광주 분원과 대구 임베디드 S/W 기업지원센터를 두고 있다. ETRI는 기관존폐가 논의됐던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최경환 경제2분과위원장(한나라당 국회의원)과 함께 대구경북을 방문하면서 지방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고 분원 설치를 요구하고 있는 대구경북의 구애와 맞아 떨어져 '지방밀착'경영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최문기 ETRI 원장과 김범일 대구시장이 고교동기인 것도 대구권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요인.

ETRI 안치득 방송통신융합연구부문장은 이날 대구시 관계자들과의 감담회에서" 대구경북이 필요로 하고 ETRI가 지원할 수 있는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상생하는 과제를 찾겠다"고 밝혔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ETRI는 IT부품·소재연구, 방송통신 융합,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 첨단 산업 부문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이는 지역 첨단산업 연구기관들의 기능과 중복되는 측면이 많다. 특히 R&D 부문 정책 및 연구기획 핵심기관이자 미래산업 융합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대구경북과학기술연구원(DGIST)과의 기능충돌과 경쟁이 불가피하다.

ETRI와 지역 R&D 기관들의 경쟁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유된다. 연구인력만 따져도 DGIST가 80여명에 불과하지만 ETRI는 1천700명이 넘고 대구권 전체 R&D 기관의 인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두배가 넘는다.

지능형 자동차 분야에서 ETRI는 DGIST와 사실상 경쟁하고 있는 상태다. DGIST는 지식경제부(옛 과학기술부)로부터 207억원 규모의 '톱브랜드(Top Brand) 프로젝트'와 50억원 규모의 지능형 자동차 부품산업화 지원 지역혁신사업을 수행하고 있어 자칫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다는 것.

이에 앞서 ETRI는 지난해 DGIST와 지능형 자동차 부품과제를 공동으로 수행하면서 사업예산을 독식, DGIST가 중도하차한 바 있다.

이인선 DGIST원장은 "ETRI가 지역 사업으로 제시한 차세대 모바일, IT 융합 지능형자동차 부품과 디스플레이, 2011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서비스 등 3개 분야, 14개 과제는 모두 지역 R&D기관들이 주력으로 하고 있는 부문이어서 ETRI와 지역 기관들의 역할분담과 기능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떻게 가야 하나

대구경북 전략산업은 전자정보기기 산업, 특히 모바일, 디스플레이 산업이 중심으로 이들 분야에서 세계일류 수준의 연구 역량을 보유한 ETRI는 이에 맞춘 기업지원시스템 구축을 고려하고 있다. 지역 전략산업이 노쇠화하고 성장기를 맞은 시점에서 중앙 핵심 R&D 기관인 ETRI의 대구·경북지역 역할증대는 일견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지역 연구기관들은 대부분 설립초기 단계여서 아직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에서 ETRI의 역량이 커진다면 자칫 지역의 R&D역량이 축소될 우려가 있다. 아울러 지역의 연구개발을 위한 정부의 자금 역시 지역 R&D 기관에 흘러들지 못하고 ETRI 단독 혹은 ETRI와 공동으로 지원 받게 된다면 지역의 R&D연구기반은 자칫 고사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때문에 지역 전략산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ETRI의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 대구, 구미, 포항을 중심으로 포진한 연구기관과 역할분담, 기능조정 등을 통해 기업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시스템 구축과 지역 기관들이 부족한 연구역량을 채워야 한다는 것.

김갑식 경북전략산업기획단 연구원은 "대구의 DGIST, 포항 포스텍, 구미의 전자정보기술원 등 지역 기관과 연계해 시너지효과를 발생할 수 있는 역할을 구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봉규 대구시정무부시장은 "ETRI 분원이 설치되더라도 지역 기관들과 연구기능 중복이 되지 않도록 모바일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춘수기자 zap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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