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지음/창비 펴냄
배꼽이 있다.
그냥 있다. '이쁘다'며 눈여겨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은밀하다'며 가리지 않은 채, 그냥 골반 뼈 대기권 밖 정지된 인공위성처럼 박혀 있다. 배꼽은 탯줄을 끊은 흔적, 태반을 가지고 태어난 포유동물의 훈장이다.
시인 문인수(63)가 '쉬' 이후 2년 만에 일곱 번째 시집 '배꼽'(창비 펴냄)을 내놓았다. 지난해 말부터 그는 대화 중 혼이 빠져나간 듯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곧 출간할 이 시집에 다녀온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공을 들인 시집이다.
당초 이 시집의 제목은 '식당의자'였다. 지난해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식당의자'를 표제작으로 할 생각이었다.
"'식당의자'는 구체적 사물이고, '배꼽'은 생명의 원천이죠. 의미를 확장할 수 있는 그 상징성 때문에 표제작을 바꾸었습니다."
'배꼽'에는 표제작을 비롯해 59편의 시가 실려 있다.
'.../걷다가 또 쉬는데/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노랗다./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꼭지' 중)
달팽이같이 잔뜩 꼬부라져 동사무소로 향하는 독거노인 할머니의 애터지게 느린 걸음에서 슬픈 기억의 끝을 낚아낸다. '꼭지' '엉덩이 자국' '조묵단전(傳)-비녀뼈' 등에서 보듯 탈골, 배꼽, 무척추 등 탯줄에서 빠져나온 생체적 이미지가 가득하다.
'.../당시엔 당연히 가슴 쪽에 나 있던 수술자국이 이 시각, 왼쪽 등뒤 주걱뼈 한뼘 아래까지 와 있다. 생각건대, 이 징그러운 흉터야말로 몸을 두고 공전하는 기억이지 싶다. 궂은날,/….'('지네-서정춘전(傳)')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물밀며 걸어들어간 자국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넣는 것인지/…/"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만금이 절창이다' 중)
몸을 따라 도는 흉터처럼 배꼽은 곳곳에서 삶의 진득한 표상들을 만들어낸다. "사람의 반은 그늘이다"는 그의 말처럼 언뜻 한이 비치기도 한다. 우주의 중심이자, 생명의 원천인 배꼽이 가진 태생적 원죄랄까.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사려 깊고 이해심이 밝다. 수압을 견디며 큰 짐승의 발자국처럼 뚝뚝 찍혀 있는 도다리의 솟구치는 저의를 독려하고('도다리'), 차들의 무서운 속력 앞에 춤추는 비닐봉지에서 바람을 삼키는 대단한 소화능력을 찬사('비닐봉지')하기도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사람 구경일 것입니다."
길가에 쭈그려 앉아 있는 인도 노파('줄서기-인도소풍'), 축 늘어진 빈젖을 문 아프리카 아이('아프리카')에서부터 동네 아마존 목욕탕의 이발사 박달희씨의 이야기('아마존')까지 그의 시선은 늘 사람에게 고정돼 있다. 그렇게 볼 때 도다리도 식당의자도, 비닐봉지도 모두 사람이다.
배꼽을 통해 사람을 보지만, 결국 그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다. "그것이 모두 내 얘기기도 하고요."
그에게 사람은 태반이고, 시는 배꼽이다. 그는 포유동물이다. 134쪽. 값 6천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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