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의 시와 함께]항아리/권오택

입력 2008-04-08 07:00:00

훨 훨 훨 봄이 지는데

뜰 아래 항아리에 봄이 지는데

靑제비 비를 몰고 몰려왔는가

항아리엔 제절로 고이는 흰 젖

흰 젖에 훨 훨 훨 봄이 지는데

몇 백 년 오랜 꿈도

항아리 속엔

고요히 잠들어서 차지 않았네

항아리엔 반 쯤

하늘의 흰 젖

그 위에 꽃무늬로 꿈이 지는데

'봄이 지는데' - '봄이 지는데' - '꿈이 지는데'로 이어지는 병렬구문이 환기하는 탄식의 정조. 찬란한 개화 뒤에는 허망한 소멸의 순간이 잇대오는 법. 한바탕 봄꿈처럼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던 꽃들은 '훨 훨 훨' 떨어지고, 때마침 내리는 봄비는 날리는 꽃잎 때문에 흰 젖이 되고 마는구나. 흰 젖은 뜰 아래 항아리에 가만히 고이는데, 그걸 바라보는 젖은 시선.

훨 훨 훨의 'ㅎ'과 항아리의 'ㅎ'과 흰 젖의 'ㅎ'과 하늘의 'ㅎ'이 겹쳐 빚어내는 유현한 공간. 못다 채운 항아리의 꿈을 안고 시인은 이미 오래 전에 그 공간으로 돌아가시고, 이 서럽고 아름다운 시편만 여기에 남아 봄밤을 밝히는구나. 사십 년 전에는 시를 쓰시는 줄 전혀 몰랐던 영어 선생님. 그 시절 까까머리 중학생 기억이 새삼 떠올리는 그 선한 덧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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