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지폐 발행 1년… 그 많던 구권 다 어디로 갔을까?

입력 2008-04-05 07:19:12

구권지폐 종착역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가보니…

▲ 화폐 정사기를 통과하기 전 테이블에 쌓여 있는 만원권 구권 지폐(위)와 정사기 통과 후 분쇄되어 원통 모양으로 압축된 후의 모습.
▲ 화폐 정사기를 통과하기 전 테이블에 쌓여 있는 만원권 구권 지폐(위)와 정사기 통과 후 분쇄되어 원통 모양으로 압축된 후의 모습.

제 이름은 '만원'입니다. 성은 '1'이고요. 돈이죠 돈. 여러분이 사랑하는 바로 그 '돈'. 아, 제가 좀 잘나갑니다. 대한민국에서 제 이름 걸고 안 되는 게 없습니다. 권력도 명예도 사랑도 제 이름 앞에서는 무릎을 꿇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짧았던 4년여 생의 마감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아니, '전생무상(錢生無常)'이랄까요. 제가 '구닥다리'라는 게 폐기 이유랍니다. 제가 크고 촌스럽다고, 가짜도 많아서 안 되겠답니다. 작년에 저보다 잘난 동생놈(신권)이 태어나서 이제 저 같은 건 필요가 없다네요. 동생들이 태어난 건 지난해 1월 22일. 동생들이 나타나면서 친구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에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세상 구경을 못했습니다. 한국은행으로 실려가 죽는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렇게 1년 2개월이 흐르자 저 같은 옛 만원짜리는 열명 중 1, 2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2008년 3월 기준 새 은행권 유통비율은 85.4%).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그동안 품어왔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리려 합니다.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자동 정사실(돈을 분류하고 폐기하는 장소). '돈의 장례식장'이라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겁니다. 하지만 외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 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친구들이 125만장이나 되기 때문이죠. 이왕 이렇게 된 거, 내친김에 '장례식장'이나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돈의 장례식장 '정사실'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금고에 도착하니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들도 상당수였습니다. 포항이나 경주·구미 등 경북뿐만 아니라 울산에서 온 친구들도 있더군요. 정사기가 있는 지역본부가 서울과 대구·부산·인천 등 전국에 9곳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동수레에 차곡차곡 실린 우리들은 현금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자동정사실로 옮겨집니다. '윙윙, 철컥철컥' 정사실 내부는 기계음으로 꽤 시끄럽습니다. 먼지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깨끗하고요. 대구경북본부에 설치된 정사기는 모두 4대인데요. 영국의 은행권 제조회사인 '델라로'사 제품이고 대당 가격이 고속정사기는 10억원, 중속정사기는 8억원이나 하는 첨단 장비라네요. 각 정사기 앞 탁자에는 제 친구들이 1천만원 단위로 묶여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정사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쭉 빨려들듯 철제 벨트를 타고 순식간에 15개의 센서를 통과했습니다. 너무 빨라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였죠. 센서는 장수 계산, 제 몸의 훼손 정도와 일련번호, 위·변조여부, 사용불가 지폐 분류 등을 한다는군요. X-ray를 찍듯 샅샅이 훑어보는 거죠. 최근까지 상태가 괜찮은 옛 1만원권은 다시 금융기관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는데요. 지난 24일부터 완전히 폐기되고 한국은행에서도 더 이상 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사기가 나오기 전에는 부천 용해공장으로 옮겨서 화학물질로 지폐를 녹였다고 합니다. 운송 과정에서 도난을 막기 위해 지폐 다발에 구멍을 뚫었고요. 이제는 정사기 덕분에 그런 작업은 다 사라졌답니다.

정사기는 위조된 사기꾼들도 걸러냅니다. 돈도 아닌 게 돈인 척하는 것들이죠. 오늘도 한놈이 걸렸습니다. 저보다 색깔도 진하고 조잡해 보였어요. 이놈들의 일련번호는 똑같습니다. '3043272 가가나' 똑같은 번호를 가진 이것들이 전국적으로 무려 6천800장이나 나왔답니다. 지폐 세계에서도 악명 높은 놈이죠.

이렇게 1만원권 기준으로 하루 125억원이 대구경북본부의 정사기를 통해 폐기됩니다. 엄청난 액수죠. 모든 친구들이 정사기를 통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투명테이프로 수술을 했거나 몸을 너무 크게 다친 친구들(극손상권)은 사람들이 직접 분류를 합니다. 자칫 정사기를 고장낼 수 있기 때문이죠. 정사실 내부는 15대의 CCTV(폐쇄회로 카메라)로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합니다. 만약 천원짜리 한장이라도 셈이 틀리면 즉시 정사기를 세우고 찾아낸다고 합니다. 하루에 10여번 정도는 그런 일이 있답니다.

정사기를 통과한 저는 바로 빠르게 도는 칼날에 세편(잘게 분쇄되는 것)됐습니다. 전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네요. 조각조각 난 저는 파이프를 타고 지하 1층의 지설물 압축저장실로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호퍼'라고 불리는 압축기를 통과하자 원통 모양의 압축 폐기물로 변했습니다. 반들반들하고 뜨끈뜨끈한 게 꼭 방앗간에서 가래떡 뽑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생이 끝나냐고요? 아닙니다. 저의 재질이 100% 면이기 때문에 재활용할 수 있는 좋은 자원이 됩니다. 주로 건축용 바닥재나 자동차 부품 원료로 다시 사용되는 거죠. 그러나 지난해 상반기에 폐기물 재활용 업체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요즘에는 그냥 일반쓰레기로 매립되고 있다고 하네요. 빨리 재활용할 수 있는 업체를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 유물이 된 구권

지난해 초 발행된 새 만원권과 천원권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월 현재 새 만원권의 유통규모는 20조9천251억원으로 전체 유통액의 85.4%를 기록했고 새 천원권은 전체 유통액(8천446억원) 중 72.1%를 차지했다. 지난 2006년 1월 2일 발행된 새 5천원권의 유통비중도 80.7%에 이른다. 평균 유통률은 81.1%로 발행 1년 만에 신권 지폐가 빠르게 정착하고 있는 셈. 구권 회수에 따라 폐기 처리된 지폐도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해 폐기된 지폐는 13조7천24억원으로 2006년 5조9천764억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 장수도 18억8천장으로 2006년 10억2천600만장보다 많다. 만원권 한장이 1.1g인 점을 감안하면 5t 트럭 443대 분량인 셈이다. 새 은행권 유통이 빨랐던 이유는 구권 회수를 위해 한은에서 금융기관에 신권을 무제한으로 공급한 덕분이다. 배병영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화폐관리팀 차장은 "예전에는 새 돈이 발행되면 각 금융기관 별로 점포 수나 화폐수급량, 업무협조도 등에 따라 한도를 정하고 차등 배정을 했다"며 "현재는 새 은행권 유통을 위해 무제한으로 공급을 하고 있지만 신권이 완전히 정착되면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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