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봄날 즐겼으면…
'폐동맥고혈압'. 심장에서 폐로 연결된 굵은 핏줄의 압력이 높아 자칫하면 터질 수 있는 병,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의료진마저도 대놓고 말하는 병, 순간적인 발작이나 심장마비, 뇌졸중 등으로 횡사할 수 있는 병, 불치병.
화창한 4월의 첫날, 달서구 상인동 비둘기아파트 자택에서 만난 도원영(25·여)씨는 "봄에 만나 다행"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눅눅하고 습한 날씨에는 어김없이 갑갑해지고 심할 경우 피를 토한다는 원영씨는 그래서인지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봄날을 만끽하자며 나선 산책길 걸음이 느리지 않았다면, 간간이 휴대용 산소발생기를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면 누구도 알 수 없을 만큼.
33㎡(10평)가 채 안 되는 아파트에서 14년째 살고 있는 원영씨의 집은 1층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팔순의 할머니와 뺑소니 교통사고로 하반신 쓰기가 힘겨운 아버지 한수(50)씨가 함께 살기 때문이다.
언니 귀연(27·여)씨는 이 집의 가장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아프지 않았다.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해 가족의 끼니를 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달성군 논공읍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 경리로 일하면서 동생과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1988년 어느 날
"20년 전이죠. 우리 가족은 울산에서 살았어요. 아빠가 뺑소니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을 때 언니(귀연)는 갓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저는 다섯살이었죠. 그때부터 피를 토하기 시작했어요.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에 왔는데 병명도 모르더군요. 그저 '심장이 안 좋다'고만 했어요. 힘겹고 고달픈 삶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집을 나갔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울면서 매달리는 제게 '잠깐 볼 일 보고 오겠다'며 나가던 엄마. 그 길로 영영 이별이 됐어요."
#2006년 어느 날
"동생(원영)이 피를 토하는 게 한두번이 아니긴 했지만, 아프다며 법석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어서 잘 모르기도 했죠. 중학생일 때부터 혼자 병원에 다녔거든요. 보통때도 피를 조금씩 토하긴 했는데 그날은 좀 심했어요. 2ℓ들이 휴지통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니까요. 할머니와 제가 동생을 들쳐 업고 병원에 갔지요. 동생의 심장기능보다 폐동맥에 문제가 있는 줄 그제서야 알았어요."
#그리고 지난해… 어느 날
"작년 장마철일 겁니다. 7월쯤인가. 피를 토해서 깜짝 놀랐지요. 젊었을 때 결핵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가 싶기도 했어요. 병원에 가니까 폐에 곰팡이가 생겨 그렇다더군요. 아버지가 돼서 애들한테 짐만 되는 것 같아요."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도 많잖아요. 저희는 아파도 서로를 챙겨주는 가족이 있잖아요."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빠지는 원영씨, 하반신을 잘 쓰지 못해 누워있는 시간이 대부분인 한수씨,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가족의 전부인 귀연씨는 "그래도 늘 감사하다"고 했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7시가 돼야 집에 오는 귀연씨지만 가족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그나마 저는 걸어다닐 수라도 있잖아요. 걸음이 느려서 그렇지만. 하하."
넉살좋게 웃는 원영씨는 불치병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일 뿐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 때까지 살아서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손금을 보라며 기자에게 쫙 펼쳐 보이는 그녀의 손바닥에 난 생명선은 유난히 길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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