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소해서 더 슬픈, 덧없는 삶의 단편들

입력 2008-04-02 07:01:42

이별 잦은 시절/로제 그르니에 지음/김화영 옮김/현대문학 펴냄

1944년. 5년째 계속된 전쟁 속 파리. 남자는 편지가 끊긴 여자를 찾아 클레르몽 페랑으로 떠난다. 전쟁 속에서 기차여행은 말 그대로 북새통이다. 전쟁의 고단함이 객차 곳곳에 묻은 그곳에서 희미하게 운명일지 모른다는 여인을 만난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허벅지에 손을 넣어 간절함을 나누지만, 그는 소식이 끊긴 여자를 위해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자의 홀대뿐,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열정의 기억만을 지닌 채 환멸과 실의에 차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별 잦은 시절'은 파리 문단의 대부로 통하는 로제 그르니에(89)의 소설집이다. '페미나 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대상' '알베르 카뮈 상' 수상작가인 그는 '프랑스의 안톤 체호프' '20세기의 모파상'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로제 그르니에는 '콩바' 지에서 알베르 카뮈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자, 작가, 문학비평가 또 프랑스 최고의 명문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해 왔다.

이 소설집에는 파리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청년이 소식이 끊어진 여인을 찾아 기차여행을 나서는 표제작 '이별 잦은 시절'을 비롯해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초당(草堂)'은 비행기 사고 현장을 찾게 된 한 지질학자의 이야기고, '오스카의 딸'은 오랫동안 한 여자를 곁에서 지켜만 봐야 했던 남자의 이야기다.

'비밀'은 부모의 차별, 동료의 멸시, 친척의 이유 없는 폭언을 묵묵히 견디며 죽는 날까지 외로웠던 한 남자의 비밀을, '몽마르트르 북쪽에'는 군부대 연예단의 스타가 된 한 남자와 훗날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동료의 이야기를, '암소같이 고약한 사랑'은 최고의 젖소치기의 영예를 잃지 않으려는 한 남자의 희대의 사기극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통해 엄청난 소용돌이에 일렁이는 슬픈 영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21세기 속에서 길을 잃은 후기 낭만주의자'라는 어느 비평가의 표현처럼 그의 작품은 슬프고 덧없고, 가슴 찌릿하다. 달착지근하지 않으니 고전적 깊이가 느껴지고, 왁자지껄하지 않으니 우수 깊은 침묵이 느껴진다.

옮긴이는 '알베르 카뮈 전집'(전 18권) 등 90여 권을 번역한 문학평론가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 그는 '옮긴이의 말'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린 하나의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드는 가엾고 참혹한 이야기들"이라고 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덧없음 때문에 사소한 삶이 더욱 소중한 것, 바로 미수(米壽)를 넘긴 작가가 주는 희망 아닐까. 224쪽. 1만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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