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시사코멘트]경쟁자와의 협력

입력 2008-03-29 10:11:15

다가오는 총선거에서 한나라당 전열이 갑자기 무너지고 있다. 공천 과정의 혼란과 분열은 막 집권해서 힘차게 출발한 정당의 정상적 모습과 너무 다르다.

이런 상황은 물론 여러 계파가 뒤엉켜 권력을 다투는 데서 나왔다. 좋은 후보들을 고르는 공천 과정이 당의 권력을 다투는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래도 찬찬히 살피면, 혼란의 궁극적 원인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사정이다.

박 전 대표를 '국정의 파트너'로 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대통령은 당선된 뒤 박 전 대표에게 적절한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내각의 구성에서 박 전 대표의 뜻을 반영한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홀대는 이 대통령의 적은 人材群(인재군)을 더욱 줄였고 뽑힌 후보들에 대한 검증을 더욱 어렵게 했다.

마침내 공천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추종자들이 많이 떨어졌고, 그것이 공천 과정 자체를 뒤흔든 폭발을 불렀다. 여느 때라면 공천을 받았을 사람들이 떨어진 터라 그들이 밖으로 나가서 한나라당 후보들과 겨룬다. 운신의 여지가 좁아진 박 전 대표는 전국적 유세를 포기했다. 원래 인기가 높고 연민의 대상인 지도자를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나라당으로선 큰 손실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는, 이 대통령 추종자들이 압도적 다수가 되면서, 그들이 임계질량을 넘은 핵물질처럼 분열한 것이다. 정치에선 이런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의 법칙(law of unintended consequences)'이 어김없이 작용하지만, 이런 사태는 여당의 완전한 장악을 시도한 이 대통령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인수위가 활동하면서 끊임없이 나온 혼란과 무능은 새 대통령이 누리는 '밀월'을 아예 없앴다. 따라서 총선거가 유리하게 끝나도, 여권의 어려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이 대통령이 입은 상처도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상황을 안정시키려면,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에게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박 전 대표는 그런 자리를 맡을 자격이 있고 이 대통령은 마련해줄 도덕적 책임이 있다. 그녀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의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좌초했을 때 거의 혼자 힘으로 배를 다시 띄웠다. 실질적으로 대통령을 결정한 한나라당의 경선에서 패배했을 때, 그녀는 패배를 선뜻 인정하는 감동적 연설로 한나라당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이 대통령은 큰 빚을 진 박 전 대표에게 야박하게 대한 셈이다. 그런 태도는 그저 도덕적 차원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야박한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덕성에서 낮은 평가를 받은 이 대통령에겐 보기보다 큰 위험이다. 지도자의 인품이 낮다고 시민들이 평가하면, 그의 지도력은 어쩔 수 없이 훼손된다. 지도력이 훼손되면, 그가 이룰 수 있는 것도 당연히 줄어든다. 시민들의 신망을 잃으면, 집권당의 장악은 이 대통령에게 그리 큰 힘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박 전 대표에게 적절한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이 대통령으로선 가장 힘센 경쟁자와의 협력이다. 당연히, 여러모로 어렵고 위험하다. 그녀와의 협력이 이내 상황을 안정시키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두 정치 지도자의 성실한 협력이 정국 안정의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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