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③추격자

입력 2008-03-29 07:49:15

무심히 말라붙은 '검은 피'…골목길에 드리운 폭력성

안양 초교생의 참혹한 주검을 건져 올리며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유괴 살해범으로 붙잡힌 사람은 아이들이 재잘대며 놀던 그 공간 안에 있던 39세의 남자였다. 불과 130m 떨어진 지하 셋방, 동심을 주시하는 그 음험한 눈빛에 우리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던 그 속에 우리 사회는 살의를 사육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추격자'가 공포스러운 것은 일상 속에, 정말 무심하게 상존하는 폭력성이다.

영화는 무방비 폭력의 무대로 세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집이다. 집은 문만 닫으면 안전한 최후의 안전가옥이다. 그러나 '추격자'의 집은 살인의 현장이고, 육중한 철대문은 외부의 적을 막기보다 연쇄살인마를 위한 살육의 펜스가 된다.

또 하나는 골목길이다. 가수 김현식의 노래 '골목길'은 수줍은 그녀의 얼굴이 창을 열고 볼 것만 같아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애련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골목길은 없다. 집으로의 탈출 통로일 뿐이다. 그래서 싸이는 '어두운 골목길 홀로 걷긴 너무 싫어… 한놈을 치긴 쳐야 다리 쫙 펴고 잘 텐데 앞에선 못해 그럼 어떡해 골목길에 숨어 뒤를 노릴 수밖에'라고 김현식의 '골목길'을 리메이크했다. 섬뜩한 살의가 도사린 골목길이 된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집과 골목이 밀집한 거대한 우리의 도시다. 살의가 요동치고 주검이 일렁이는 무방비의 도시다.

화가 박철호는 이 세가지 폭력의 이미지를 작품 속에 녹여 넣었다. 울창한 빌딩숲은 주위를 살펴볼 새도 없이, 닫고 사는 도시의 무심함을 보여준다. 도시의 익명성을 무대로 활개치는 연쇄살인마의 잔인한 폭력성을 거친 발로 그렸다. 그 발의 몸통이 바로 도시라는 것을 화가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발아래 나약한 주검들이 놓여 있고, 작품 전면에 검은 피를 뿌렸다. 왜 하필 검은 피일까. 붉은 피는 죽음이지만 또한 생명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검은 피는 재생 불가능하고 유통기한 만료된 피를 뜻한다. 몇달 동안 수색에도 찾지 못했던 어린 죽음의 피도 이처럼 말라붙은 검은색이었을 것이다.

시집 '비열한 거리'로 도시의 음울한 이미지를 잘 그려낸 시인 박미영은 '추격자'를 본 후 '사소하고 치명적인 틈'이란 시를 썼다.

역시 깨진 보도블록의 틈새에 끼인 구두굽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이 살의에 포획된 여인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차갑고 더러운 욕조에 들어붙은 머리카락'은 영화 속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그려진 폭력이미지다.

'추격자'에서 푸줏간이 된 가정집 목욕탕은 전형적인 70년대식이다. 녹슨 수도관과 오래된 작은 타일, 창마저 두꺼운 벽돌로 막혀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곳이다. 민주화가 요원했던 70년대식 폭력은 이제 구원조차 받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폐쇄공간으로 악화된 것이다. 검은 피가 묻은 두피와 머리카락은 고결한 인간이 무심하게 말살된 끔찍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파울첼란의 '죽음의 푸가'에서 인용한 '오 누구, 오 아무, 오 아무도 아닌,'을 강한 고딕으로 쓰고 있다. 파울첼란은 인종말살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으로 결국 자살로 아픈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가해진 폭력과 여기에 무심했던 인간이란 종(種), 그리고 고결한 인간이 무심하게 사라져가는 끔찍한 기억을 시로 썼다. 이 시의 이미지는 절묘하게 '추격자'와 오버랩된다. 정말 '사소하고 치명적인 틈'이 아닐 수 없다.

그 틈을 헤집고 사소한 말장난에 부드럽게 섞여 슬쩍 스미는 연탄가스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더한 것은 그 죽음의 향기 속에 희미하게 풍겨오는 빵 냄새다.

순하디 순한 표정을 한 영민의 손에 무심하게 죽어간 미진이 마지막 맡은 것도 빵 냄새가 아닐까. 정말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삶의 냄새. 오! 정말 누구, 오! 정말 아무, 오! 정말 아무도 아닌….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추격자(2008)

감독:나홍진

출연:김윤석, 하정우, 서영희

러닝타임:123분

줄거리:출장안마소(보도방)를 운영하는 전직 형사 '중호', 최근 데리고 있던 여자들이 잇달아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고, 조금 전 나간 미진을 불러낸 손님의 전화번호와 사라진 여자들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번호가 일치함을 알아낸다. 하지만 미진마저도 연락이 두절되고, 그녀를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영민'과 마주친 중호, 옷에 묻은 피를 보고 영민이 바로 그놈인 것을 직감하고 추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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