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없이 살 길 없다" 집도 들도 생각도 '재창조'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으로 우리 농업과 농촌은 죽느냐 사느냐의 사활이 걸린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이제는 농민뿐 아니라 온 국민, 행정기관이 힘을 합쳐 구농(救農)에 나서야 한다. 아직 식량주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달리 대안도 없다.
중요한 것은 농촌의 미래도 희망도 경쟁력 확보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국가적 의지와 비전, 전략을 갖고 한데 뭉친다면 농업은 더 이상 사양산업이 아니라 신성장 산업으로 화려하게 거듭나고 모두 떠나버린 농촌에는 다시 활기가 넘칠 것이다. 행정기관과 주민이 협력, 희망찬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 들녘을 찾았다.
◆지역공동체의 재창조
상주시 이안면 문창리 녹동마을 주민 14가구 중 10가구는 지난달부터 8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다. 물론 댐 건설에 따른 이주민이나 수재민은 아니다. 정든 집이 있던 동네는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몇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서졌다. 이들이 마을 어귀의 컨테이너로 보금자리를 옮긴 것은 스스로 원한 일이다. 경북도와 상주시, 한국농촌공사가 26억원을 들여 전국 첫 사례로 추진하는 농촌마을 재개발사업이다.
오는 연말이면 마을 2만4천500㎡(약 7천450평)는 완전히 다른 마을로 탈바꿈한다. 반듯한 새 집과 함께 좁은 골목길은 자동차가 다닐 만큼 넓혀진다. 함께 일하고 함께 쉴 수 있도록 공동 농기계창고, 게이트볼장도 들어선다.
변하는 것은 겉모습뿐이 아니다. 직장을 찾아 마을을 떠났던 16가구도 서울, 대구 등지에서 귀농할 예정이어서 북적거리던 옛 모습을 되찾게 된다. 또 주민공동사업을 위해 마을 앞 논 1만6천여㎡(5천평)를 주민 공동으로 빌려 연꽃단지로 조성, 연꽃차·국수·비누 등을 생산한다.
주민 전욱현(62)씨는 "주택 신축비용 등 부담도 적지 않았지만 새로운 활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만장일치로 재개발에 동의했다"며 "올해 들어서만 해도 전국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200여명이 마을을 찾았다"고 귀띔했다.
배용수 경북도 농촌개발 담당은 "재개발은 대도시에서나 있는 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농촌이 단순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공간에서 '살고 싶은 곳'으로 바뀌어야 진정한 농업 경쟁력 강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농촌에 더 필요한 사업"이라며 "2018년까지 200개 마을을 '새마을'로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방 농정의 새로운 실험
"식초공장을 유치하면 친환경농업에 큰 도움이 되는데 현행 법으로는 농업진흥지역에 공장 설립이 안 됩니다. 불합리한 규제를 풀어주십시오." "축산농가들이 사료비 부담으로 어려움이 큽니다. 농지를 빌려서 사료작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임차료를 지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20일 청도군 화양읍 '와인터널'은 경주 경산 영천 청도에서 온 농민, 공무원 30여명이 쏟아내는 각종 아이디어와 정책 비판으로 뜨거웠다. 지난해 11월 전국 처음으로 조례를 제정, 도지사 직속으로 설치한 '경북 농어업 FTA대책특별위원회'의 현장순회 간담회 자리였다.
농업분야에도 각종 위원회는 수도 없이 자주 등장했고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FTA대책특별위원회는 기존 자문기구와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실질적으로 예산집행(올해 6억원)과 정책결정 권한을 갖는다. 단순한 행정에 대한 조언·권고·심의기능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55명의 위원들은 대학, 연구기관, 생산자·소비자 대표, 민간기업 대표들도 구성돼 있으며 전공분야도 농업, 마케팅, 생명공학, 국제통상, 인력개발, 산업디자인 등 다양하다. 대구 EXCO에 별도 사무실도 마련돼 있고 올해 신설한 'FTA농축산대책과'가 사무국 역할을 맡고 있다. 전문성 확보를 위해 농촌인력양성분과위원회와 농수산연구개발분과위원회 등 2개 소위원회로 나뉘어져 있으며 '2020 비전 및 발전전략수립 특별위원회'를 다음달 구성할 예정이다.
최양부(62·전 청와대 농림수산수석비서관) 위원장은 "현장 건의 내용 중 3분의 2는 과거부터 제기돼 왔던 문제여서 농업행정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며 "농민 소득향상과 직결되는 중장기 발전전략을 마련해 경북도와 중앙정부에 적극 건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기존 마인드로는 안 된다
시장의 경계가 사라진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핵심요소는 전문인력 양성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18일 농림수산식품부 업무보고에서 젊은 농업CEO 양성을 강조한 바 있다.
경주 양남면에서 파프리카 2ha를 재배하는 백민석(45)씨도 성공한 CEO를 꿈꾸고 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15년 전 귀농한 그는 그동안 벼농사를 짓다 지난해 파프리카 재배에 뛰어들었다. 조금 더 나은 수익이 목적이었지만 지난해 등록한 '경북농민사관학교 파프리카 과정'은 그에게 '우리 농업도 반도체처럼 세계시장을 제패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백씨는 "해외 기술연수에서 네덜란드가 연간 200억달러의 농업수출을 올린다는 말을 듣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농업도 평생 공부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경북도가 지난해부터 운영하고 있는 농민사관학교는 농업의 미래를 개척할 농업전문 CEO 양성이 목표다. 지역 내 기존 대학·연구기관을 활용하고 교육과정별 학점제를 도입해 농민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평생교육을 받을 수 있다.
경북도는 이밖에 올해부터 2017년까지 농어촌진흥기금 1천억원을 조성, FTA 대책자금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지난 1993년 전국 처음으로 기금 마련에 나서 지난해 1천억원 달성의 당초 목표를 이뤘지만 개방 확대에 따른 위기 극복과 지역 농수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재원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기금은 경북도, 각 시·군뿐 아니라 농협·수협 등 생산자단체도 공동으로 참여하는 게 특징이다. 행정기관에서 확보한 예산에 생산자단체가 더해져 실질적으로 농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더 커지는 셈이다.
이태암 경북도 농수산국장은 "중앙에서 지원하는 예산은 명목이 정해져 지역의 특수성을 살릴 수 있는데 한계가 있지만 자체 기금지원 사업은 지역 역점사업에 집중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차별화된 정책 시행이 가능하다"며 "농민들이 필요한 사업을 구상해서 신청하면 적극적으로 검토해 지원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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