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백호주의…172국 이민자 '공존 새역사'
외국인 100만명 시대.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들을 우리 사회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외모가 다르다고 편견을 가지는 것은 한국뿐이다"고 말하는 외국인들. 단순한 푸념으로 받아들이기엔 우리 사회가 가진 배타성이 너무나 뿌리 깊다. 우리는 다문화 다민족 사회를 어떻게 준비해야할까? 취재팀은 그 해법을 해외 취재를 통해 찾아봤다.
◆年 11만명 받아들여 저출산 해결
172개국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나라 호주. 그들은 서로 다른 피부 빛과 언어, 문화 속에서 어떻게 200여년의 역사를 써 왔을까?
남부 빅토리아주의 대표적인 도시 멜버른. 취재팀은 지난 6일 멜버른 시민들이 약속 장소로 가장 즐겨찾는다는 플린더스 기차역(Flinders Street Station)을 찾았다. 오후 7시쯤 빅토리아 거리를 따라 다다른 기차역 주변은 인종 박물관을 연상케 할 만큼 각양각색의 피부 빛을 가진 사람들이 북적였다. 인근 연방광장(Federation Square)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몸을 흔드는 만국의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광장 어느 곳에서도 이질적 모습에 사시적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다양한 피부 빛과 문화가 한데 어울려 발산하는 독특함이 이민자의 나라 호주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피부 빛에서부터, 옷 입는 스타일, 머리 모양까지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그들이 내뱉는 언어 중에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말들도 들려왔다. 로이 크루커(28)씨는 "19세기 중반 골드러시 때 들어온 이민자들에 의해 발전된 도시 멜버른의 정체성은 이민자의 다양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서로 사람들과 그들이 지닌 다양한 문화가 도시의 독특한 색깔을 입히고 있다"고 했다.
멜버른 시민들은 밋밋하던 도시를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이 바꿔놨다고 했다. 론스데일과 러셀 가(街) 사이의 그리스 거리, 리틀버크와 러셀 가 사이의 차이나타운, 라이곤과 칼톤 가 사이의 이탈리아 거리, 브런즈윅 가와 시드니로드 사이의 중동거리 등은 한 도시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옮겨놓은 듯했다.
호주 정부의 이민자 수용은 적극적이다. 심각한 저출산 문제로 골몰하고 있는 정부는 국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민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다. 연간 11만명에 달하는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정부는 최근 임대 주택 건설을 위해 1만5천명의 해외 건축 근로자들의 호주 내 취업을 허용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하는 등 호주 이민을 유도하고 있다. 백호주의(白濠主義)란 말은 사전에서나 볼 수 있다.
◆이질적 문화를 호주발전 원동력으로
그러면서 이민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다. 그중 이민자 커뮤니티 정착 서비스는 이민자들이 가능한 한 빨리 호주 사회에 적응,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비영어권 이민자에 대한 영어 교육은 물론 주거지 찾기, 보육시설 찾기, 의료 기관 통역서비스 등 이들이 호주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동화'가 아닌 '다문화 주의'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호주 정부의 원칙은 시민권 심사 때부터 확인된다.
이민 18년째인 다니엘 김씨는 "실생활에 필요한 영어 테스트를 하지만 모국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잊지 말 것도 당부한다"며 "완벽한 호주인으로 동화시키기보다 그들이 가진 이질적 배경을 살리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했다.
두 가지 이상의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시민들이 호주의 발전을 이끌어갈 원동력으로 바라보는 호주 정부의 적극적인 다문화 정책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보니 이민자들은 소수민족으로 호주의 한 모퉁이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이 갖는 '파워' 역시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계 이민자 출신인 존 소 멜버른 시장. 호주의 대표 도시 중 하나인 멜버른 시를 이끌고 있는 소 시장은 중국 남부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했다 17세 때 멜버른으로 건너온 이민자다.
2001년 7월 시장선거에서 당선된 후 그는 강력한 범죄소탕 캠페인과 연방정부의 원주민 박물관 유치 등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중국계 이민 2세 쒸엔 팡씨는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이민자 출신인데다 그가 가진 성품과 행동 같은 동양적 배경이 멜버른의 발전에 새로운 힘이 되고 있다'고 했다.
호주 멜버른에서 글·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이민자 정착 돕는 문화사랑방…흄市 '글로벌 러닝 센터'
지난 7일 오전 11시 흄 시(Hume City)의 글로벌 러닝 센터(Global Learning Centre) 2층 도서관.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 자녀 20여명이 부모와 함께 둥그렇게 앉아 동화속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The green blue sky it tries to fly(푸른 하늘을 날아봐요)"
교사가 읽어주는 동화 이야기에 아이들은 따라 읽으며 몸짓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됐지만 이민자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달라 하짐 담당자는 "이민자와 그들의 자녀가 낯선 땅에서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언어"라며 "놀이와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좀더 쉽게 영어를 접하며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민자와 그들 2세의 호주 정착을 돕는 언어교육은 정부는 물론, 여러 민간단체에서도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영어에 익숙지 않은 이민자 및 자녀를 대상으로 집중영어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연방정부와 지방정부에서는 온라인 및 전화서비스를 통해 다국어 통역 및 번역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공공도서관과 비슷한 시정부 운영의 도서관은 이민자와 그들과 어울려 사는 주민들의 만남과 이해의 장을 열어주는 주민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민자는 물론 그들의 자녀, 이웃을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시킨다는 것.
하짐씨는 "이민자들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이웃으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며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도서관은 글로벌 러닝 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운영 방식이 독특하다. '영어' 뿐 아니라 크로아티아 그리스 베트남 이탈리아 중국 아랍 터키 스페인 등 10여개국의 언어로 쓰여진 책들을 진열했으며 세계 각국의 신문과 DVD 등을 갖춰놓고 이민자들이 고국의 문화와 언어를 손쉽게 접하도록 했다. 영어가 서툰 이민자들은 같은 언어권의 이민자들이 도우미로 나서 돕는다.
저스틴 도서 담당자는 "주민들의 34% 정도가 이민자들로 구성됐다 보니 그들의 나라별, 언어별 책이 필요하다"며 "시민들이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각종 외국어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이민자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겪는 언어와 문화적인 이질감을 없애주고 어릴 때부터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데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결혼이민 여성인 트린 넉 호아씨는 "생활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다 영어도 손쉽게 배울 수 있다"며 "엄마 나라 얘기를 자주 할 수 있어 아이들이 겪게될 정체성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최두성기자
♠ "이민자 다독였더니 도시전체 활력 넘쳐'
"시민 모두가 참가해 학습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흄시(Hume city) 글로벌 러닝 센터(Global Learning Centre)의 조지 오스본 매니저는 흄시가 빅토리아주의 학습도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고 자랑했다. 시 정부와 상공계, 시민들이 한 구성원으로 움직이는 파트너십이 그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멜버른 시내에서 20㎞ 떨어진 흄시는 한때 호주 공업생산량의 40%를 차지할 만큼 산업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90년대 불황으로 공장이 속속 문을 닫으면서 도시는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인구의 34%(5만4천명)가 이민자로 구성된 흄시는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교육환경도 큰 문제로 떠올랐다.
"산업도시의 위상이 추락한데다 이민자 비율이 높다보니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이 몰린 낙후 지역으로 손가락질을 받았죠."
흄시는 지역의 발전 전략을 이민자 등 주민의 학습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동기 유발을 위해 지역의 상공계와 리더들을 끌어들여 손발을 맞췄다. 목적은 학습을 통한 주민들의 생활향상. 시는 부지를 제공하고 연방정부와 주정부, 지역의 상공계, 시민들은 1천220만호주달러(한화 117억원)의 기금을 모았다. 2003년 센터는 빅토리아주에서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민자들 경우 '우리는 안 된다'는 열등 의식이 높았죠. 그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놓고, 할 수 있다는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흄시는 300여개에 달하는 회원기관과의 네트워킹 통해 질높은 학습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오스본 매니저는 "공공기관의 한 부서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기관과 조직, 개인이 뭉쳐서 주민 복지를 위해 뛰고 있다"고 했다.
글로벌 러닝 센터가 문을 연 지 올해로 5년째. 흄시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새로운 교육도시로 우뚝서고 있다. 주민들의 교육 열기가 반영되면서 교육부에서는 새로운 중·고교 신설을 검토하고 있고, 센터 인근에는 쇼핑 센터가 입주했다.
"함께 배웁시다." 흄시는 높은 도시 이민자의 문맹률을 극복하면서 평생학습교육 도시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
최두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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