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의 시와 함께] 자개장롱/김은경

입력 2008-03-19 07:00:00

장롱이 나간다

처음 도시로 이사 나와

서부 중고물물센터에서 삼십만 원 주고 사온

자개장롱이 집을 떠나고 있다

십오 년이니 제 딴에는 견딜 만큼 견딘 것인가

장롱 들어낸 자리에 소복한 먼지

그 속엔

향기 다 사라진 아카시아껌

패가 제대로 나오지 않던 아버지의 화투짝과

푸른 날 잃은 도루코 칼 한 자루,

사춘기 울음이 지나가고

부끄러운 그림자 머물기도 하던

내 지난 열병의 한 궤짝,

오래도록 한 식구이던 것이 이제 폐물이 되어 떠나간다

과분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나던

그나마 유일한 우리집의 자랑이던 자개장롱,

도둑맞을 추억 하나 없이

포근한 이불 한 채 잘 개켜 넣어주지도 못했는데

장롱은 삐걱삐걱, 맞지 않은 아귀를 절룩이며

피곤한 십오 년 가족사의 흔적마저 모조리 트럭에 싣고 간다

이제 쉰을 훌쩍 넘어선 아버지는

돋보기 너머로

트럭의 꽁무니를 장롱의 오래된 뒷모습을 쳐다보신다

누구라도 뒷모습이란 저처럼 무거운 것이었나

액자를 떼고 나면 비로소 도드라져 보이지. 못 하나에 걸려 있던 시간의 무게를. 누렇게 변색된 꽃무늬 벽지에 도려낸 듯 깨끗한 자국, 거기에서 발견하는 복면 쓴 삶의 진실. 첫사랑, 첫 수업, 첫 월급, 첫 영성체…… 세상 모든 첫 마음의 원적(原籍)을 확인하게 되지.

'패가 제대로 나오지 않던' 꼬인 인생. 그러므로 생활은 늘 '삐걱삐걱, 맞지 않은 아귀를 절룩이며' 흘러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하여 '반짝반짝 빛이 나던' 우리의 각오는 '소복한 먼지' 속에서 변색될 수밖에 없었던 것. 이 모든 생활의 맨얼굴을 정색하며 바라보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극사실의 묘사가 지니고 있는 구체성의 힘이다. 시인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