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의 정당들은 선거 때 중앙당에서 후보를 공천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모든 공직후보의 공천은 지역구의 당원들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주요정당들도 선거전에 후보공천을 위한 심사기구를 두지 않는다. 자민당의 경우 당헌 당규에 '총재(총리)가 공천한다'라고 규정했다. 즉, 당간사장이 人選案(인선안)을 만들어 총재가 승인하는 형식이다.
그렇다고 간사장이 공천을 마음대로 독단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평소 중앙당의 사무국은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47道都府縣(도도부현) 지부는 각 지구당의 여론과 지역활동 등을 철저하게 점검한 것들이 중요한 성적표가 된다.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하여 4년마다 한차례씩 熱病(열병)과 홍역을 치러오고 있다. 이른바 공천열병-공천홍역이다. 공천심사가 끝난 뒤에는 야당은 낙천자들이 성토, 반박하는 유인물을 뿌리고 도끼로 당사를 부수며 오물을 뿌리는 등 소란을 피웠다.
반면 여당은 겉으로는 모두가 이의 없이 승복하는 듯 조용하다. 반발과 항변은 곧 총재-대통령에 대한 도전과 거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뜨거운 피눈물을 쏟으며 울분을 삼키곤 한다.
한나라당이 18대 총선을 얼마 앞두고 지난주 파격적인 공천으로 술렁이고 있다. 영남의 경우 17대 현역의원 62명 중 25명을 교체한 것. 이는 불출마를 선언한 김용갑·김광원 의원까지 포함하면 모두 27명, 43.5%를 새 얼굴로 바꾼 것이다.
물론 그 동안 당 지도부는 이명박 정부가 대국민 공약 등 각종 국정과제를 원활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원내 60% 이상의 안정의석을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대적인 인물교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따라서 대대적인 물갈이의 대상으로 오랫동안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온 영남권이 지목됐고 공천지망생들과 많은 유권자들은 늘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는 식상함을 능력 있는 참신한 인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게 사실이다.
이번 파격적인 물갈이가 눈길을 끄는 것은 25명이라는 규모도 그렇고, 親(친) 이명박계 10, 친 박근혜계 12, 중립계 3명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다선에다 중진급인 박희태, 이강두, 김무성, 김기춘, 정형근, 권철현, 안택수, 이해봉 의원 등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안강민 공천심사위원장은 "의정활동, 역량 전문성, 도덕성, 당선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한 개혁공천"임을 강조했다. 수도권은 전문가 중심으로, 충청과 호남은 정체성과 지역사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영남은 개혁지향성을 중점적으로 고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박계측은 "박근혜 죽이기다", "보복학살이다", "여론조사에서 크게 앞섰음에도 대거 탈락시켰다", "청와대의 기획공천, 密旨(밀지)공천이다", "이재오, 이방호 공천"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친이계측은 "우리측 다선중진이 더 희생됐다. 기획공천 운운은 외부인사들이 참여한 심사위를 모욕하는 것" 이라고 반박했다.
어찌되었든 심사위가 전 정부와 타 정당에 있었던 일부 철새족과 비리전력자를 공천한 것은 분명히 잘못한 처사였다.
이번에 공천위원회는 과연 영남권의 玉石(옥석)을 명확하게 가렸는가. 공천 때마다 상당수 새 인물로 교체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 물갈이가 능력 있는 새 인물로 당의 새 모습으로 평가 받을지, 아니면 한나라당의 이름으로 쉽게 당선되는 것이어서 단순히 인물을 바꿔볼 것인지는 유권자들이 심판할 것이다.
지난 1960년대부터 정치부 기자로서 역대 국회의원 선거를 취재해온 필자는 되풀이되는 공천파동을 볼 때마다 왜 우리는 민주정치의 기본인 '지역 당원들에 의한 후보공천'을 시행하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에 잠기곤 한다.
물론 이번 18대의 경우, 총선까지 시일이 너무나 촉박하고 지역당원대회에 맡기면 엄청난 과열경쟁, 특히 종이당원을 얻기 위한 검은 돈과 부정이 횡행하고 결국은 불량공천을 할 가능성이 있으며 자칫 현역의원 및 지역협의회장의 독무대가 될 여지가 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근다"고 언제까지나 우려만 할 것인가? 공천 때 각 지역별로 현지의 법조인 학계 시민단체 등만으로 공천관리위를 구성, 당원명부와 예선관리 등을 전담케 하여 공정성을 확보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엉거주춤한 민주국가이다. 일반당원, 지역당원에게 후보공천권을 주지 않는 한 민주선거 민주정치의 시대는 아직도 멀다.
이성춘(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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