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의 교육프리즘] 기다릴 줄 아는 부모

입력 2008-03-11 07:19:35

수학 시험에서 늘 만점을 받던 학생이 어느 날 뚜렷한 이유 없이 80점을 받을 수 있다. 이때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다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요즘 늦게 일어날 때 알아봤다. 너 갑자기 옷에는 왜 그렇게 신경을 쓰니? 여자 친구 생겼나?' 많은 부모님들이 성적이 내려간 시점 전후에 목격한 마땅치 못한 행동들을 나열하며 학생을 자극한다. 담임선생님에게 전화하여 아이가 해이해져 있으니 꾸중을 좀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학생은 어머니의 잔소리나 선생님의 충고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음 시험을 못 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협박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다음 시험에서 학생은 시험 시작 전부터 바짝 긴장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원래 점수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훨씬 비장한 각오와 자세로 문제를 풀어 나간다. 몇 문제 풀다가 즉시 풀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면 풀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만점을 받지 못하면 큰 일 난다는 심적 부담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문제풀이 자체에 몰두하지 못한다.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더욱 악착같이 달려들기보다는 어머니의 성난 얼굴을 시험지 위로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생활이 즐겁지 못하고 자신감을 잃은 상태에서는 그 다음 시험에서도 역시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몇 차례 거듭 시험을 망치게 되면 어머니는 당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느 날 드디어 어머니가 체념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한다. '어떻게 하겠나. 이 집안 내력인데. 아버지도 수학 때문에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 고모도 수학 때문에 약대를 못 갔단다. 집안 전체가 수학을 못하는데 너라고 예외일 수 있겠느냐.'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쐐기를 박는 말이다. 유전적 요인 때문에 아버지와 고모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선언으로 학생은 수학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중3 학부모와 학생 사이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례를 정리한 내용이다. 처음 시험을 못 쳤을 때 '괜찮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다음에는 잘 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더라면 그 학생은 다음달에 바로 원래 성적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나치게 심적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혼자 툭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고, 조심해서 걷지 않았다고 꾸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칭찬과 격려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도전적인 자세를 가지게 하는 최고의 특효약이다. 자녀를 신나게 하는 부모는 현명하게 기다릴 줄 안다.

윤일현(교육평론가·송원교육문화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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