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관의 시와 함께] 종이 가시내 /박재열

입력 2008-03-04 07:00:00

종이 가시내야, 종이처럼 하얀, 종이처럼 헤픈, 종이처럼 값싼,

종이처럼 구겨지는, 종이 속에 잠자는,

종이 흔들면 부시시 깨어나는

종이처럼 드라이한, 티슈처럼 보드라운

네 고운 피부에, 떠오르는 대로 메모하고 싶구나

예쁜 메모도 샤프펜슬로 네 피부 찢어 쓰고 싶구나

그리고는 뺨에 비비고, 구기고, 찢고 싶구나, 그러나 꽃 같은 가슴이 구겨지면……

네 티슈 같은 피부, 시집처럼 조용히 넘겨지는구나

종이처럼 푸석한 치마, 밑의 흰 다리, 프린터 속에 밀려 들어가는구나

볼록한 가슴 프린터에 납작 순종하는구나

종이 가시내야, 프린터에 네 미소와 가슴과 다리를 까맣게 뭉개지는구나

핼쓱하게 웃는, 종이 미소, 프린터에서 밀려나오는, 흑백의 종이 가시내야

'종이 가시내야', 네 원적은 동남아 열대 삼림. 어쩌다 이 춥고 험한 한반도로 시집을 와서 구겨지고, 찢기고, 뭉개지는 삶을 사는 거냐. 곱고 부드러운 흰 피부, 누르면 납작 순종하는 착한 심성. 얼굴에 낙서를 해도, '꽃 같은 가슴'이 구겨져도, '치마, 밑의 흰 다리' 까맣게 뭉개져도 그저 핼쓱하게 웃기만 하는 등신.

이 '종이 가시내'에 대한 지극한 연민이 숨 가쁜 리듬을 자아올리게 만드는구나. 그러나 이 시에는 연민의 감정과 더불어 가학적인 욕망이 겹쳐 있으니, 이러한 양가감정이야말로 이 땅의 누이나 아내나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우리의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겠는가.

당대 문학적 관습에 익숙한 시들이 판치는 한국 시단에 무의식에 닿아있는 환유적 시법으로 '낯선 시'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시인. 이 진지한 작업에 눈길 던지는 사람이 드문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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