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월 초면 각급 학교가 개학한다. 성격이 그리 소탈하지도 못하고 붙임성이 부족한 나로서는 늘 새로운 친구와의 사귐도 서먹하지만, 새로운 선생님과의 만남은 더욱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은사님을 찾아뵙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나에게도 해마다 꼭꼭 찾아뵙는 스승이 한분 계신다. 치기 넘치던 대학 시절, 만취 상태에서 밤늦게 선생님댁을 방문해서 그 집 화장실을 엉망으로 만든 게 인연이 되었던지,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일로 자주 뵙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2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선생님은 참으로 낙천적이고 소탈한 분으로서, 지금까지 당신께서 화를 내시거나 슬퍼하시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딱 한번, 스승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칠순 잔치를 대신해 열린 선생님의 수필집 출판기념회 자리에서였다.
선생님께서는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유산으로 받은 것은 '연필 두자루' 뿐이었다. 고향을 떠나 홀어머니와 함께 대구로 온 선생님은 고학으로 야간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이러한 선생님께서 정년퇴직 후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말았다. 그러나 워낙에 성격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선생님인지라 어린아이처럼 걸음마 연습을 열심히 하여 비록 지팡이에 의지하기는 하지만 외출도 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틈틈이 쓰신 글로 수필집도 엮고, 제자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하시게 된 것이다.
인사말씀을 하러 마이크 앞에 선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며 울먹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내게 주신 연필 두자루, 이것이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 사랑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는 목이 메어 몇번이나 손수건을 꺼내셨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노스승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그 스승께서 지난겨울에 서울 아들네 집에 다니러 가셨다가 그만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뼈를 크게 다치셨다. 석달 동안 입원 치료를 하다가 설 지나서야 퇴원하셨다. 선생님댁에 뵈러 갔더니 "5년 전에는 뇌졸중으로 대통령 선거에 투표 못했고, 이번에는 골절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지 못했으니, 나는 대통령 선거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허허 웃으신다.
노스승의 그런 낙천성이 나는 좋다. 조금씩 철들며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 선친으로부터 받은 사랑 못지않게 나 또한 그 스승으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았다. 연필로 치자면, 두자루 아니라 두다스는 족히 넘을 것이다.
부동산 투자는 할 줄 모르고 땅 대신 하늘을 만 평 사 두신 그 스승은 김원중(金元重) 시인이시다.
변준석(시인·영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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