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냄새…새벽의 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요?
지구에는 새벽이 있다. 매일 아침 바삐 출근할 때는 그 걸 느낄 새가 없었다. 새벽이 오는 그 시간에 나는 짜증스럽게 이불 속을 뒤척이며 오전의 회의와 오후에 만나야 할 사람들, 어제 미룬 일들을 떠올렸다. 새벽의 냄새를 맡아본 적도 없고(과거에 맡았던 냄새는 이미 잊혀졌으며), 새벽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새벽의 색깔이 때로는 파란색, 때로는 초록색, 그리고 때론 갈색이기도 하다는 것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구의 새벽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삶'이라는 전쟁을 치르는지 태어나서 30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처음 알았다.
'케이프 맥클리어'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말라위 호숫가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아프리카 지도의 어딘가에 점처럼 박힌 곳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그리고 대륙을 건너온 나같은 여행자의 나른한 휴식도 그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 새벽에 알았다.
그 곳에는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치고는 관광객이 많았다. 케이프 맥클리어는 말라위 호수 선박여행의 출발지 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깨끗한 햇살에 호수가 눈부시도록 빛나는 대낮이면 컬러풀한 수영복을 입은 백인과 나 같은 동양인들이 호숫가 모래사장 여기저기에 평화롭게 누워있다. 바오밥나무와 망고나무가 없다면 서유럽의 고급스러운 해변리조트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그 날 새벽, 나는 일출을 보기 위해 호숫가로 나갔다. 대낮의 관광객들은 모두 잠들어있을 터이니 나 혼자 아름다운 호수를 독차지하며 아프리카의 아침 해를 마음껏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담장 너머 설핏 보이는 호수는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나는 우뚝 멈춰섰다. 그 곳에는 내가 잊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케이프 맥클리어에 사는 마을주민들이었다.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이른 새벽 아프리카의 호숫가에는 엄마와 큰 언니를 따라 조그만 소녀들이 커다란 설거지통과 빨래통을 머리에 이고 나온다. 부지런히 그릇을 씻고 빨래를 빠는 소리가 조용한 새벽공기를 흩으며 덜그럭덜그럭, 철퍼덕철퍼덕, 요란하다. 빨래터와 우물가가 늘 그러하듯 호숫가 아낙들의 입담도 시끌벅적하다. 설거지와 빨래를 끝낸 소녀들은 치맛자락을 들치며 거리낌 없이 목욕을 한다. 사람이 있으니 호수가 더 아름답다. 나는 이 마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몰랐다. 하루 종일 호숫물과 모래사장만 보는동안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오지마을마다 우물물이 바짝 마르는 아프리카의 건기(비가 잘 내리지 않아 기후가 건조한 시기)였다. 식수 걱정을 달고사는 이들에게는 물이 차 있을 때에도 우물가에서의 목욕과 빨래는 금물이다. 강이나 호수가 가까운 건 그나마 다행이다. 물가에서 먼 마을의 여인들에게는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이 밥 짓는 것보다 중요한 집안일이다. 어린시절 우리 할머니는 이불이든 음식이든 커다란 보자기에 꽁꽁 묶어서 머리 위에 번쩍 올려 이고는 "옛날에는 이렇게 하고 10리는 걸었지."라고 말했었다.
어린시절의 할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옛날'은 더욱 '옛날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되었지만, 아프리카의 여인들은 여전히 매일 무거운 짐을 이고 수 킬로미터를 걷는다. 심지어 등에 아이를 업고도 머리에 물동이를 진다.
너댓 살밖에 안된 여자아이들도 제 몸보다 커다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간다. 보는 사람이 아슬아슬하기는 해도 물동이를 진 꼬마들의 표정은 야무지다. 어찌나 균형을 잘 잡는지, 때로는 냅다 뛰기도 하면서 물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다. 때론 주전자나 냄비도 머리에 인다. 땔감·돗자리·파인애플이나 망고까지 머리에 인걸 보면 묘기대행진에 나가도 될 것 같다. 너댓 살 꼬마부터 일흔 살 할머니까지, 아프리카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상 머리에 못 일건 세상에 없다.
어슴푸레하던 하늘이 밝아지니 소녀들의 팔뚝과 종아리가 너무 가늘다.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들의 짐은 더 무거워졌다. 한 통엔 방금 빨래한 옷가지들과 설거지한 그릇들, 다른 한 통엔 밥을 지을 호숫물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식수로 쓸 호숫물은 뜨겁게 펄펄 끓여질 것이다. 그녀들은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없는 뜨거운 방안에서 뜨거운 호숫물을 마시며 뜨거운 한낮을 보낼 것이다. 이미 높이 뜬 아침 해는 오늘도 뜨겁게 작렬할 기세이다. 생수통과 콜라병을 양손에 든 관광객들이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 모일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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