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맺힌 상처, 아픈 기억…모두 흘려 버려라
물은 사연을 따라 길을 낸다. 변함없이, 말없이 흐르지만 역사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사연을 담아 흐르는 물길에는 영주 '죽계수(竹溪水)'를 빼놓을 수 없다. 대나무가 많은 시내라고 해 이름 붙은 죽계수는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해 영주 순흥마을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 상류로 흘러들어 가는 물길이다. 죽계수에 담긴 사연은 녹록지 않다. 퇴계 이황 선생이 반했다는 자연의 비경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실패해 참형 당한 영주 선비들의 애절한 한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죽계구곡
소백산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죽계수는 기암괴석을 휘감아 죽계구곡에 떨어진다. 솟구치는 물방울이 마치 수정 구슬을 흩어 놓은 듯 아홉구비 절경을 빚어낸 죽계구곡은 안축 선생이 읊은 죽계별곡의 배경. 조선 중기에는 주세붕, 퇴계 이황 선생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었다 한다. 2km에 걸쳐 9곡 이화동부터 1곡 금당반석까지 자리 잡고 있는데 1, 2, 4, 5, 9곡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제 1곡 금당반석엔 아담한 폭포와 소 앞으로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다. 살을 엘 듯한 찬바람은 여전하지만 늦겨울 계곡엔 봄오는 소리가 들린다. 햇살을 받아 살얼음에 살짝 비치는 죽계수는 "이제 그만 나가고 싶다."며 금방이라도 얼음을 뚫고 솟구칠 기세다. 죽계구곡에 봄이 오면 미끄러져 내려가는 죽계수에 바위와 느티나무 고목들이 한데 어울려 신비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2,3곡을 지나 4곡에 이르면 소 한 가운데 둥근바위가 놓여 있다. 소에 떨어지는 물길은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는 모습을 닮았다 해 용추비폭이라 불린다. 5,6곡을 지나 7곡쯤에 이르면 완연한 봄기운이다. '졸졸 졸'…. 사막 한 가운데 솟은 오아시스처럼 군데군데 얼음 구멍 사이로 맑디맑은 시냇물이 흘러간다. 돌에 낀 이끼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푸르고 푸르다. 계곡 가에는 막 싹을 틔운 버들강아지가 봄을 알린다. 솜털만으로 늦겨울 추위를 버티는 버들강아지의 늠름한 기상이 대견스럽다.
◆죽계제월교
죽계구곡을 빠져나온 죽계수 물길은 영주 순흥마을에 접어들고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가로지르는 죽계제월교를 지나친다. 죽계구곡에 풍류가 넘친다면 죽계제월교는 가슴아픈 순흥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순흥은 '제2의 한양'이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던 마을. 고려말에도 한강 이북은 송도라 하고 한강 이남은 순흥이라 해 남순북송(南順北宋)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사방 십리 안에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정도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줄을 이었고, 풍수적으로도 으뜸가는 곳이라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의 으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순흥의 영화는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유배되면서 한 순간에 사라진다. 때는 세조3년(1457년).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군사와 선비를 모으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다. 순흥으로 들이닥친 관군이 사방 10리 이내의 세 살 이상 양반남자를 모아 닥치는 대로 참형한다.
당시 참형 장소가 바로 죽계제월교 였고, 수천 명의 순흥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순흥 선비들의 피는 '죽계천'을 따라 7km에 이어지며 지금의 안정면 동촌 1리에까지 이르렀다. 죽계천을 '핏걸'(걸은 개울이란 말의 경상도 방언), 동촌 1리를 '피끝마을'이라 달리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계제월교는 '청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때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들이 차마 못 죽이고 서울로 데려와 키운데서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월교라는 이름은 정축지변이 있은 지 253년 뒤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한 것. 장맛비가 걷힌 뒤 맑은 하늘 같은 선비의 기운이 감돈다는 뜻. 훗날 선비들은 '개성 송도는 선죽교, 영주 순흥에는 제월교'라고 부르며 충절의 다리로 기억했다.
◆경(敬)자 바위
죽계제월교를 지난 죽계수는 소수서원을 휘감아 돌며 순흥의 아픈 역사를 다시 어루만진다. 소수서원 경렴정에 서면 죽계수를 낀 계곡 바위에 경(敬)자가 쓰여 있다.
순흥고을이 숙종 때 다시 복원되고 순흥부사로 처음 부임한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 서원(소수서원)을 세울 때의 일. 밤마다 죽계천을 떠도는 원혼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단종 복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무참히 처형된 원혼들이었다. 주세붕 선생은 이런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를 새겼다. 경(敬)은 유교의 근본 사상인 경천애인의 머리글자. 바위 위에 글을 새기고 붉은 칠을 한 연후에야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멈췄다.
※여행정보
가는 길-북대구 나들목을 나와 중앙고속도를 탄 뒤 풍기 나들목에서 빠져나가 931번 지방도를 달린다. 순흥면 소재지 지나자마자, 소수서원·선비촌 못 미쳐 읍내사거리에서 초암사 팻말 보고 좌회전. 죽계호를 끼고 3㎞쯤 직진하면 배점리 초암사 주차장. 왼쪽 시멘트 길로 300m 쯤 올라가면 2km에 걸쳐 죽계구곡의 9곡에서 1곡이 차례로 펼쳐진다. 죽계제월교는 다시 읍내사거리로 나와 좌회전하면 소수 서원과 선비촌을 연결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먹을 곳-순흥면 소재지에 메밀묵밥을 잘하는 순흥전통묵밥(054-634-4614)이 유명하다. 30년 전통에 값도 싸다. 묵밥 1인분 기준 4천원.
둘러볼 곳-죽계구곡 주변에는 부석사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천년 역사를 간직한 절이 있다. 죽계구곡 1곡 들어서지 직전의 초암사는 의상대사가 부석사 세울 곳을 찾기 위해 임시로 초막을 짓고 머물던 곳으로 6·25 때 불타 최근 다시 지었고, 통일신라 때 삼층석탑과 부도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죽계구곡 진입로에서 간판을 따라 비좁은 3km 남짓한 곳에 위치한 성혈사엔 나한전 문짝(보물 제832호)이 유명하다. 연꽃무늬를 새긴 문살로 양쪽 문을 장식했고, 가운데 문 두 짝엔 연못·게·물고기·동자상·여의주·기러기 등을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이상준 기자 all4you@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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