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유치환의 '행복'

입력 2008-02-26 07:14:40

연모의 마음은 시를 낳고

'청마거리'라는 표지판을 따라 많은 인파가 오가는 거리로 들어갔다. 보통 지방도시의 중심가 풍경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중앙우체국 건물이 보이고 그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휴일이어서 우체국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우체국 앞에 대리석으로 조형물을 만들고 청마의 시 '행복'을 새겨놓았다. 그것조차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건물. 지금처럼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 아마도 청마는 수없이 그리움의 마음을 어떤 대상에게 보내기 위해 이 건물 안을 드나들었을 게다. 자신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우체국 앞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은 그만큼 흘러버렸고 지난 시간의 흔적들도 지운다. 쓸쓸했다.

청마는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들을 연모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의 마음으로 자신의 시를 창조했다.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지만 사실 그에게 여인들이란 항상 얻지 못할 영혼이 요구하는 어떤 갈구의 응답과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청마하면 떠오르는 여인은 단연 이영도이다.

청마는 1946년께 이윤수 시인 등과 함께 '竹筍'(죽순) 동인을 했다. 청마가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죽순' 동인을 통해서다. 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였다. 첫눈에 연모를 느낀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연모의 시를 썼다. 하지만 청마의 이영도에 대한 사랑은 매우 고통스런 사랑이었으리라. 아무리 연모해도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그리움의 조각들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를 찌르기도 했다. 결국 그러한 마음은 아름다운 그리움의 시를 만들어내었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중략…)//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늦은 점심을 끝내고 청마문학관을 찾아 나섰다. 통영시청의 문화관광과를 통해 정량동 863의 1번지라는 주소 하나를 달랑 들고 차를 몰았다. 남망산을 옆으로 끼고 돌아나가자 산등성이 한 면을 그대로 깎아 만든 듯한 가파른 층계의 끝에는 하얀 풍향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통영기상대였다. 그 층계의 중간쯤 왼편으로 생소한 초가지붕과 말쑥한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청마문학관. 아래서 보았던 초가는 문학관 개관과 함께 복원해 놓은 청마의 생가였다. 원래 청마 생가는 태평동 522번지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상 도로에 편입되는 바람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여기 망일봉(望日峰)에 당시의 생가를 복원, 청마 삶터 및 문학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고 했다. 생가에는 '柳藥局'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었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약재 봉지들이 한약방을 하시던 당시 부친의 이력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문은 휴일이라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쉬움을 견딜 수 없었으나 다음을 기약하면서 한 장의 사진만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일제 말기라는 극한 상황과 해방공간의 격동, 또한 한국전쟁과 전쟁 이후의 폐허라는 불행한 현대사 속에서 뜨거운 생명의지를 통해 살아있음의 허무에 도전하고 그것과 처절히 맞싸워 이기려 했던 생명파 시인 유치환. '생명'에 대한 열애(熱愛)란 결국 '인간'에 대한 열애이다. 그가 그토록 그 속에 함몰되지 않으려 노력했던 '애련'(愛憐)도 결국 인간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그리움이 아니었겠는가?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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