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옛집과 숭례문

입력 2008-02-23 08:57:02

그가 옛집을 문득 떠올린 것은 긴 연휴가 끝나는 어느 날이었다. 옛집은 市(시) 북쪽 외곽 퇴락한 공장지대에 있는 지은 지 45년 된 삼층집이었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30여 년간 그는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말로 그 일대는 도시개발에서도 밀려나 거의 슬럼화된 듯했는데, 누군가는 60년대 영화 세트장으로 쓰면 더할 나위 없겠더란 말도 덧붙였다.

자동차 키를 들고 나온 대문 밖은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바람이 찼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그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갈 것인가. 문득 이층에서 삼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을 떠올렸을 뿐인데 그곳엘 가기 위해 차에 올라 탄 자신이 너무 생뚱맞게 느껴졌던 것이다. 무료한 연휴 탓이야.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이십 대 이후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공연히 차창을 손으로 한 번 쓱 훑어 내린 그는 꺾어진 골목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앞이 트인 사차선 도로 전면으로 푸르스름하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찬바람 때문인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짙은 주홍 노을이 펼쳐져 있다. 옛집이 있는 동네의 저 落照(낙조)는 600년 전 한 出鄕(출향) 인사에 의해 도시의 十景(십경)에 꼽히기도 했다. 어린 눈에도 친구 아버지들보다 훨씬 늙어 보여 안쓰럽던 아버지는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하나 일러주셨다. 그러다가 그는 '친구를 보낸 강가 모래밭에 뒹구는 푸른 술병'이란 대목에서 무언지 모를 감정에 북받쳐 섧게 울었다는 기억을 해낸다.

아주 친근하게 여겨지는 길모퉁이를 돌아 좌회전을 하고 다시 우회전을 했다. 이제 곧 옛집에 살 때 다니던 작은 店房(점방)이 나올 것이고, 배꼽마당이라 불리던 공터도 나타날 것이다. 묘한 흥분에 싸여 그는 몸을 바짝 차창에 밀어붙이고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아아, 그 모든 것은 사라져버렸는가. 기억의 한 귀퉁이가 뻥 뚫려져 나간 듯 낯선 슈퍼와 빌라가 어릴 적 식구들 몰래 사 먹던 삼각비닐에 든 색물처럼 요란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었나. 불안해지기 시작한 그가 더더욱 창에 몸을 붙이고 차를 몰기 시작한다. 빠앙- 뒷차가 경적을 울린다. 급히 차를 비켜 세우는데 눈에 익은 상호가 눈앞에 보인다. 금강당 빵집, 흘러내린 붉은 페인트 글씨로 창틀이 있는 유리마다 한 자씩 씌어져 있다. 솥을 금방 열었는지 아직도 뿌옇게 김이 서려 있는 낡은 진열장. 주차를 하고 그는 빵집 안으로 들어선다. 백발이 된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지만 그를 전혀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다.

종이 봉지에 든 찐빵을 꺼내 우물우물 씹으며 그는 옛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뜨거운 팥의 김 때문인지 눈앞이 흐리다. 불 꺼진 집은 마치 비죽이 솟은 한 그루 자작나무처럼 어두운 골목에 버티고 서 있고, 그가 태어나던 날 새벽 아버지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산파를 부르러 뛰어나가셨다던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 후 오랫동안 그는 삼층집 아이라고 불리었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벽의 타일들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자신의 삶에서 십여 년에 불과했던 이 집에서의 생활이 끊임없이 꿈에 출몰하던 것을 떠올린다. 계단에서 떨어지던 꿈, 이층 창으로 바라던 포장이 되지 않았던 거리, 꿈 분석으론 떨칠 수 없는 불편함 또는 트라우마(trauma)가 그 꿈의 알갱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그에게 이 집은 포근한 담요 같은 동갑내기 친구였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쓸쓸하지.

30여 년 만의 邂逅(해후)로 녹초가 된 그가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자 화면에는 수도의 관문이었던 남쪽 큰문이 불타고 있다는 자막이 떴다. 이어서 곧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꺼질 듯한 탄식과 함께 600년 된 문이 결국은 고스란히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생중계되었다. 붉은 화염은 기어코 그 문을 까맣게 사그라뜨렸던 것이다. 연휴가 끝나는 그날 밤 내내 그는 수도의 남쪽 큰문에 얽힌 꿈들을 낱낱 곱씹고 있을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뜬눈으로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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