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2월23일 국무회의는 대학 교련을 필수로 하는 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확정했다. 종래의 예비역 교관을 현역으로 바꾸고, 매주 2시간씩 3학년까지 실시해오던 훈련을 매주 3시간씩 4년간 총 711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내용. 다만 711시간 이수자에게는 현역 복무기간을 단축하는 혜택을 주기로 했다. 정부는'국가가 총무장한다는 전제 아래 적령기 대학생들이 군사교육을 받음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한다'고 목적을 밝혔다. 일차 목표는 대학생 교련 과목의 신설이었다. 그에따라 정부는 새학기부터 당장 시행토록 했다. 이에 맞서 학생들은 3월 신학기가 시작되자 교련 수강신청을 전면 거부하면서 연일 교련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당시 학생들은 공산세력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안보를 위하여 정부가 학생들을 병영 안에 가두겠다는 속셈이라는 것. 이후 4월 대통령선거와 맞물려 교련반대는 반정부로 이어졌다.
학생 군사 훈련은 일제강점기의 산물. 이러한 교련이 한국에서 부활한 것은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124군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한 사건 때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 과목을 신설했다.
▶1905년 국제로타리 클럽 창설 ▶1907년 작가 이효석 출생
정보관리부 이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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