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것도 입을 것도 신을 것도 부족하던 내 어릴 적에는 1년 내내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다. 설이 다가오면 우리들은 마음이 설레 산에 나무를 하러 가도 멀리 있는 산에 가지 않고 어디 가까운 산에 가서 대충 한 짐, 아니 반 짐도 채 못 되게 해서 지고 살짝 집에다 던져다 두고 모여서 놀곤 했었다. 그럴 때면 어른들도 관대해져서 보고도 그냥 한마디 하거나 아니면 웃고 지나갔다.
동네에서 들려오는 떡방아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가시고 나면 산을 몇 개나 넘어서 마중을 나가기도 했었다. 우리들이 가장 기다리고 기다리는 설빔이었다. 설빔은 보통 옷과 신발이었다. 명절 때가 아니면 새 옷을 입어 보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시커먼 검정색에 끈을 꿰는 구멍이 양쪽에 3개가 있는 운동화는 당시 최고 인기였다. 아마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운동화를 준다면 쳐다보지도 않을 그런 신발이다.
그러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저녁에(거의 밤중에) 목욕을 했다. 목욕은 물을 데워서 부엌에서 했는데 추운 겨울이라 무슨 통과의례를 하는 것처럼 좀 고역이었다. 순서를 기다려서 차례대로 하는데 그것만 끝내면 마치 무슨 주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설날이 되면 이른 아침에 차례를 지냈는데 우리 집은 제사가 좀 많다 보니 제일 일찍 시작해도 끝나기는 맨 나중에 끝이 났었다. 동작 빠른 Y는(나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같이 많이 어울려 놀았었다) 제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세배하겠다고 찾아와서 진을 치고 앉아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다른 아이들은 차례를 지낸 후에 바로 동네를 쏘다니며 놀았지만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아버지를 따라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마을을 지나 산소에 성묘를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성묘가 끝나고 그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좋았으랴만 그건 오로지 나의 희망 사항이었다. 산소가 있는 동네는 우리 집안이 다 모여있는 그런 집성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집안 일가를 일일이 다 찾아보시고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날 생각을 않으셨다. 촌수가 높다 보니 아버지가 집안의 최고 어른이셨는데 덕분에 나도 대접(?)을 받곤 했었다. 도련님 왔다면서 맛있는 것을 많이 대접받곤 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내내 동네에 가 있었다.
마당을 쓰는 빗자루에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들어 집으로 돌아올 때는 늘 한밤중이었다.
내가 제대로 놀기 시작하는 날은 설날이 아닌 초이튿날부터였다. 여럿이 모여 이 집 저 집 세배를 하러 가면 보통 세뱃돈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한상 거하게 받곤 했었다. 좀 더 커서 청년이 된 이후부터는 음식상에 술도 같이 나왔다.
우리들의 설은 애태우게 만들며 어렵사리 찾아왔다가 갈 때는 가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었다. 1년 내내 손꼽아가며 기다렸던 우리들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병태(대구시 서구 평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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