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비디오방, PC방 등 이른바 '방 문화'가 없던 그 시절…. 신세대 대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하리라. '도대체 그때는 무슨 재미로 살았지?' 여학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커피숍에 앉아 두세 시간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지만, 남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당구가 있었다. 10분에 50~200원. 한 시간 동안 2명 또는 4명이 놀아도 단돈 1천~2천 원이면 해결되는 놀이.
한창 재미에 빠져들 때면 수업 시간표는 온데간데없고, 아침에 당구장 문 열 때부터 점심, 저녁을 해결하고 밤 늦은 시간 버스가 끊길 무렵에야 아쉬움을 뒤로하며 초췌한 모습으로 격전의 현장을 빠져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당구는 인생이었고, 당구장은 졸업 후 온몸으로 부딪히게 될 치열한 전장의 실험동이었다. '전투 식량'은 자장면이었고, 담배 연기는 자욱한 포연을 방불케 했다. 라면 한 그릇에 600원이던 그 시절, 전투에서 패배한 병사는 목숨 대신 피 같은 용돈을 1만 원 넘게 지불해야 했다.
◆당구, 직장인 곁으로 돌아오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돌고 돈다. 전공 관련 책이 도서관 몇 층에 있는지는 몰라도 학교 앞 당구장 분위기와 당구대 성질을 줄줄이 꿰고 있던 대학생은 용케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됐다. 처음 사회생활을 하며 이리 깨지고 저리 부딪히던 초년병들은 적당히 직장생활을 즐기고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연차가 됐다. 시류를 좇아 PC방도 기웃거려 보고, 나름대로 레포츠를 즐긴답시며 돌아다녀 봤지만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다. 짜릿한 손맛이 그립고, 허겁지겁 단무지 한 개를 벗 삼아 줄곧 먹어대던 자장면도 그립다.
태어난 곳을 찾아 수천㎞를 회귀하는 연어처럼 그 시절의 추억을 찾아 직장인들이 돌아오고 있다. 당구장으로. 회사원 이상호(33) 씨와 김일준(34) 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당구를 친다. 동종 업계의 경쟁업체에 다니면서 낮에는 업무로 경쟁하고, 밤이면 당구로 경쟁한다. 한때 둘 다 애인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당구는 필요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둘은 비슷한 시기 이별의 아픔을 겪었고, 이를 달래줄 방법을 찾던 중 당구를 떠올렸다. 오후 8시쯤 만나면 자정을 넘겨서야 전투는 끝난다. 실력도 엇비슷하다. 한 게임에 1만 원씩 판돈을 걸고 내기 당구를 친다. 처음엔 농담도 주고받고, "살살 하라."며 어르고 달래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이 끝나고 내기 돈이 오고간 뒤, 분위기는 딴판이 된다. 창과 칼이 만나고, 섬광이 번뜩인다. 물리면 죽는다는 위기감 속에 장엄함마저 감돈다.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한 상가 골목. 몇 해 전만 해도 한 곳 뿐이던 당구장이 최근 3곳으로 늘었다. 걸어서 10분쯤 거리에 주차장까지 갖춘 호화판 당구장도 등장했다. 이곳뿐이 아니다. 대구시내 당구장은 한때 존폐 위기에 놓일 만큼 사그라졌다가 다시 기사회생하고 있다. 직장인들이 돌아오면서 시내 당구장은 점심, 저녁시간에 북적거려 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고, 주택가 당구장에도 저녁 시간이면 삼삼오오 찾아든 직장 남성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옛 대구당구협회 창설을 주도한 윤석수 동아당구재료총판 대표는 "한때 1천800여 개에 달했던 대구시내 당구장은 IMF 사태 이후 침체 일로를 걸어 250여 개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가 최근 650여 개로 늘었다."고 말했다. 이런 인기에 보태 작년 초 차유람이라는 당구 얼짱 스타가 탄생했고, 아시안게임 본선에 3회 연속 진출하면서 금메달을 10개 획득하기도 했다. 케이블과 지상파 TV에서 당구 중계가 늘었고, 예전 당구를 모르던 사람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
◆당구장에선 역시 자장면!
당구장을 말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장면. 사실 표준어 표기는 '자장면'이지만 '짜장' 또는 '짜장면'이라고 앞음절에 강세를 줘서 주문하지 않으면 마치 단물 빠진 껌을 씹는 것처럼 맛이 나지 않는다. 정화중(49) 장원교육 이사도 당구장의 묘미는 뭐니 해도 당구장에서 시켜먹는 자장면 한 그릇이라고 말한다. 30년간 당구를 치며 자장면을 즐겨왔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맛이라며 극찬한다. 정 이사가 자주 찾는다는 청아당구장 뒤편 중국집은 당구장 손님들이 빼놓을 수 없는 단골이다.
당구장에 배달 온 종업원은 "요즘은 자장면뿐 아니라 각종 식사와 함께 요리도 즐겨 먹는 편"이라며 "예전에는 용돈이 궁한 대학생들이 그저 끼니를 때우기 위해 값싼 자장면만 찾았지만 최근 들어 다양한 요리 주문도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먹을거리가 어디 자장면뿐이랴. 저녁 무렵 당구장을 오가며 김밥을 팔던 아주머니들도 아련한 추억이 됐다. 그 시절 당구장 김밥은 일일이 썰어서 팔지 않았다. 길게 만 김밥 한 줄을 집게에 집어서 우적우적 끊어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방금 자장면을 먹고 돌아서도 "한 줄만 팔아달라."며 부탁하는 김밥 아주머니의 간절한 눈길을 떨치지 못해 200원짜리 김밥 한 줄을 추가하기도 했다.
한 당구장 주인은 먹을거리도 많이 변했다고 했다. 자장면은 변치 않는 기호 음식이지만 김밥은 사라진 지 오래고, 대신 갖가지 한식·분식 등이 배달된다. 통닭이나 족발도 시켜 먹으며 간단하게 생맥주 한잔을 곁들이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IMF와 PC방이라는 파고를 거치며 변화를 겪은 당구장에도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많다. 직장인 이모(28) 씨는 "담배를 입에 물고 그 연기에 눈이 매워 찡그리면서도 매서운 눈으로 공을 겨누는 모습이나 당구대 여기저기 담뱃불로 인해 생긴 자국들은 여전하다."고 했다. '300 이하 맛세이 금지'라는 경고문도 여전하다. 멋도 모르고 폼 잡자고 굳이 당구공을 위에서 내리찍는 사람은 여전한가 보다. 신 벗고 편하게 치라고 놔두는 슬리퍼도 필수품. 10분당 1천 원이라는 당구비도 10년 넘게 요지부동이니 마찬가지라 하겠다.
대구 달서구 용산동에서 당구장을 하는 김모(42) 씨는 "당구가 생활체육이 되면서 당구장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미성년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예전처럼 학생지도 선생님과 숨바꼭질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오히려 담배를 꼬나물고 당구를 치는 학생들은 분위기를 해치기 때문에 '사양'한다.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와서 당구를 가르치는 아빠들도 많아졌습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 당구장에도 꼴불견은 있다!
세상 어디에서나 그렇듯 당구장에도 꼴불견이 있게 마련이다. 꼭 한 번 이상은 헛치면서도 입으로는 수백 수준의 실력이라고 자랑하는 밉상, 치라는 공은 잘못 치면서 초크질은 죽어라 하는 왕초보, 당구값 내기 싫어 자신이 이길 때까지 계속 '한 게임 더!'를 외치는 진드기, 찍지 말라는 '맛세이' 꼭 해서 당구대 천에 꼭 구멍을 내는 고집불통….
"친구랑 와서 구경만 하고 있는 여자, 왜 그렇게 보기 싫던지."라며 기억을 더듬는 당구인도 많다. 이런 꼴불견 짓이야 친구들 사이에서만 누가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옆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경기가 안 풀린다고 욕하는 사람, 담배 연기 아무렇게나 내뿜고 피우던 담배를 올려놓아 당구대에 담배 자국을 남기는 사람, 바닥에 침 뱉는 사람을 보면 당구 치고 싶은 마음이 달아난다.
대구 시내 최대 당구장(당구대 25대)을 운영하고 있는 윤석수(56·사진) 동아당구재료총판 대표는 "이런 꼴불견은 요즘 많이 사라졌다. 당구를 대하는 태도 또한 매우 진지해지면서 의식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전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