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을 아시나요]남산동 콩국집

입력 2008-02-14 15:09:14

뜨거운 콩국 한 그릇에 세상사 시름 '사르르'

27년째 같은 자리에서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밤을 낮삼아 일하는 서민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었던 대구 중구 남산동'제일콩국(프린스 호텔 맞은 편)'여주인 임국자(58) 씨. "요즘 손님들 표정을 보면 하나같이 기가 죽어 있는 표정이에요. 장사가 너무 안 된다는 푸념들이 많죠. 특히 택시기사들은 불쌍할 정도니까요. 하루 13시간 이상 일하고도 손에 쥐는 수입은 쥐꼬리만도 못하니까요."

주로 노래방이나 주점의 종업원, 택시기사, 경찰 등 밤늦게 또는 새벽까지 일하는 사람들과 쓰린 속을 달래려는 취객이 단골들인 까닭에 이들의 삶은 바로 콩국에 비친 임씨의'세상읽기'다.

뜨거운 콩국 한 그릇에 처진 어깨가 조금이나마 올라가는 것이 임씨의 보람이기에 그가 내미는 콩국은 늘 그릇이 넘쳐난다.

국산 생콩을 갈아 끓인 국에 밀가루와 찹쌀 2종류의 기름 튀김(일명 아부라기)을 썰어 넣고 계란 노른자를 풀어낸 콩국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부동의 야식 메뉴. 당시엔 손님의 80%는 택시기사였지만 입소문 덕분인지 지금은 70% 이상이 일반 손님이다.

단골 수가 어느 정도 되냐고 묻자 임씨는"대구에서 대전으로 이사 간 젊은 부부가 매년 서너 차례씩 찾아오죠."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어 비번인 날을 빼고 10여 년째 매일 찾는 택시기사며, 음주단속 후 들른 아들 같은 전경은 한 그릇 값에 콩국을 내리 4그릇이나 비웠다는 등 콩국을 만들며 들려주는 임씨의 단골 이야기에는 사람 사는 훈훈한 정이 듬뿍 담겨 있다.

"굳이 장삿속이 아니라 편안하고 맛있게 먹고 갈 수 있는 정으로 가게를 하고 있다."는 임씨는 걸인이 콩국 한 그릇을 봉지에 사달라고 해서 까닭은 물었더니 임신한 아내에게 주고 싶다는 말에 배를 채워주고 양손에 콩국 봉지를 들려 보낸 일 등 몇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또 어느날 자정무렵 가게 앞을 머뭇거리는 노인을 안으로 들였는데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어서 사연을 물었더니 아들에게 흠씬 맞고 거리로 쫓겨난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였다.

오갈 데 없는 할머니는 밤늦게 헤매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임씨 가게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 임씨는 그 때 자신도 모르게 분하고 떨리는 마음에 콩국을 대접한 후 경찰에 보호처분을 맡겼지만 그날 밤은 내내 가슴이 아렸다고. 임씨가 처음 가게를 할 때 한 그릇에 500원(지난 달 8일부터 올라 현재는 3천 원)이던 콩국은 당시 자장면이나 택시 기본요금보다 비쌌다는 회고담은 바로 우리의 삶이다.

"내 청춘을 받쳐 가게를 끌어왔지만 난 행복해요. 식구들이 콩국 덕에 먹고 살았고 딸아이 공부도 마쳤으니까요."이런 임씨는 최근 5,6년째 취미생활로 고전무용을 익히고 있다. 지금도 콩국의 정확한 원가개념은 잘 모른다는 그의 곁에는 남편이 묵묵히 일을 거들고 있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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