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 대구 할매 번역작가 되다

입력 2008-02-14 10:11:50

일어판 '주머니 속의 그리스 신화' 옮긴 박옥선 할머니

86세에 번역작가로 등단한 할머니가 있다. 1922년생 박옥선(대구시 중구 삼덕동) 씨가 최근 '주머니 속의 그리스 신화(야마다 무네무쯔 원작/가라뫼출판사·224쪽)'를 번역, 출간한 것이다.

"오래 전 읽었던 일본판 그리스 신화를 다시 읽다가 우리말로 바꿔보고 싶어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책상 위에 번역한 원고지가 수북이 쌓여가던 어느 날 막내딸이 "엄마는 참 충격적인 노인이야, 언제 이런 걸 번역하셨어?"라며 책을 내보자고 권했다. "정말? 어디 한번 해볼까?"라며 시작한 것이 책이 된 것이다.

하루 2시간에서 많게는 6시간 정도 번역과 원고작성에 매달렸다. 박 할머니가 원고지에 번역하고 막내딸이 컴퓨터에 입력했다. 확인과 교정과정을 합쳐 2년이 걸렸다. 번역과 제작과정에서 딸과 다투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원전의 뜻은 알겠는데 알맞은 우리말이 생각나지 않아 백과사전과 국어사전을 펴놓고 밤낮으로 씨름하기도 했다. 마침내 책이 나왔을 때 딸과 사위가 더 좋아했다. 박 할머니는 생각해 보면 그 과정이 재미이고 보람이라고 했다.

출판사 측은 "우리나라 최고령 나이에 처녀 번역작을 낸 예로 추정된다."고 했다. 박 할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귀국해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퇴직 후에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서 체력과 지적 능력을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는 신들의 혈연관계가 복잡한 책이다. 그래서 설렁설렁 읽으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들다. 박 할머니는 독자가 헷갈리지 않게 올림포스 12신을 큰 줄기에 놓고 조연급이라고 할 방계 신들까지 마치 나무가 가지를 뻗듯 조리있게 펼쳐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물리적 두께보다 풍성하다.

박 할머니는 "나이 든다는 것은 멋있는 일입니다. 시간을 따라 몸이 낡아가는 과정이지만 인간의 가치가 더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집중력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노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데 책만한 매개체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박옥선 번역작가는 번역에 필요한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단전호흡하고, 식사시간, 수면시간, 운동시간을 정확하게 지켰다. 그는 "노인에게 노동은 보약과 같은 것"이라며 "나이 들었다고 물러서지 말고 무엇이든 시작해보자."고 했다. 번역작가의 길로 들어선 박옥선 씨는 "흥미로운 책이 눈에 띄면 언제라도 다시 원고지 앞에 앉을 것"이라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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