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땅 가야산] (31)홍제암과 백련암

입력 2008-02-11 07:01:05

사명대사·성철스님 일갈 들리는 듯

창건된 지 1천200년이 넘은 법보종찰 해인사(海印寺). 그 장구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고승과 선승을 배출한 사찰로도 명망이 높다. 해인사에서 정진했거나, 해인사와 인연을 맺은 고승·선승들이 밤 하늘의 별처럼 많다 보니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해인사 본사는 물론 16개에 이르는 암자마다 고승들의 숨결과 발자취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특히 '산 좋고 물 맑은' 가야산에 터를 잡은 암자들을 찾으면 그 청정한 기운 속에서 고승들의 설법을 다시 듣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정갈해진다.

네 개로 쪼개졌다 다시 붙여 세워진 사명 대사비!

해인사 일주문에서 서쪽으로 200여m를 가면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홍제암(弘濟庵)이다. 이곳은 사명(四溟) 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법명이 유정(惟政), 호가 사명당(四溟堂)인 스님(1544~1610)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크게 활약했다. 전란이 끝난 후 이곳에 머물던 스님이 열반에 들자 광해군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란 시호를 내렸고, 암자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홍제암을 찾은 날, 동장군이 맹위를 떨쳐서인지 암자는 고즈넉하다. 암자 마당에 있는 커다란 수조에는 얼음 기둥이 만들어졌다. 사명 대사가 살았던 시절도 이 매서운 겨울처럼 춥고 엄혹한 시절이었다. 왜인들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고, 전란 속에서 민초들의 삶은 고달팠다.

서산(西山) 법맥의 적통으로 누란의 시절을 살았던 스님에게 진과 속은 구분없는 한마당 삶의 무대였다. 수행승의 면모는 물론 국가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몸소 나서 해결하려 했던 양면을 겸비한 것도 스님의 이 같은 생각이 밑바탕이 됐다. 무공을 세운 장수이거나 외교적 성과를 이룬 외교 수완가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가장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지성인, 경륜가로서의 면모도 스님은 잘 보여준다.

여러 차례 중수한 탓에 홍제암에서 사명 대사의 발자취를 찾기는 힘들다. 오히려 암자 옆에 있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그 행장을 기록한 석장비에서 스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거대한 종 모양의 부도는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뤘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다.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았고,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올려놨다.

사명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는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許筠)이 지었다. 문장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대사의 행장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 가치도 높다.

더불어 이 비에는 나라 잃은 아픔도 스며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43년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일본인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가 주동이 돼 비를 십자로 깨뜨려 파묻었다. 1958년 다시 비를 접합해 세웠는데, 비에는 열 십자(十字) 흉터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비를 쪼갰던 일본인 서장은 통영경찰서장으로 전보 발령돼 7일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얘기도 전해오고 있다.

성철 스님 자취 서린 백련암!

'해인사지'는 가야산에서 홍제암, 원당암, 백련암(白蓮庵)을 가장 유서 깊고, 경치가 아름다운 3곳의 암자들로 꼽고 있다. 백련암은 산내 암자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한적하고, 경계 또한 탁 트여 시원하다.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옛날부터 백련암을 가야산의 으뜸 가는 절승지로 일컬어왔다.

오래전부터 고승들이 수행처로 삼아온 이곳은 역대로 산중 어른들이 주석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소암 대사를 비롯 환적, 풍계, 성봉, 인파 대사와 같은 스님들이 주석해왔고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한 곳으로 유명하다.

백련암 원통전 앞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부처님의 얼굴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불면석(佛面石)이라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실로 당겨도 바위가 당겨온단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촉촉이 젖은 백련암에 서니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무소유의 청빈한 삶으로 아직도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스님의 자취를 백련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사진에서 봤던 댓돌 위에 놓여 있던 스님의 털신도 생각이 난다.

속세와 관계를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했던 스님은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행한 8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밤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하는 것)와 10년 간의 묵언(默言) 등으로 세인들에게 각인돼 있다.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된 이후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백련암에서 구도를 계속했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며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이었던 스님은 1993년 열반에 들면서 열반송을 남겼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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