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이기도 하지만 '반추(反芻:되풀이하여 음미하고 생각함)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 어느 한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가슴 한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회귀하고 싶은 추억이나 공간이 있기 마련. 사람에 대한 추억도 아련하지만 특정 장소에 대한 추억도 그에 못지 않게 마음 한쪽을 저리게 한다. 연령대별로 청춘이 녹아들어 있는 추억의 장소를 들어봤다.
◆'혹톨' '가보세'에 얽힌 추억=대구 문단의 원로인 도광의(67) 시인은 추억의 장소로 대구 중앙로 아카데미극장과 대구백화점 사이 골목에 있던 '혹톨'을 들었다. 생맥주집인 '혹톨'은 1960년대 문인묵객들의 단골집이었다. "경북대를 다니던 시절 이 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며 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리움을 곱씹었지요. 경제나 사회에 대한 이야기보단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한적하면서도 정적인 분위기, 그리고 여유 같은 게 느껴져 혹톨을 자주 찾았어요."
도 시인은 더불어 생맥주집 '가보세'도 자주 찾은 추억의 장소로 꼽았다. "작고한 서정주 시인은 시인에게는 삶이 약간은 비참한 것이 좋다고 하셨지요.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고,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저의 시들이 일관성을 갖고 있고, 소우주를 담으려 고민하는 그 밑바탕에는 젊은 날 생맥주집에서 문학에 대해 열정을 불태운 것이 큰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봐야지요."
◆청춘이 녹아든 팔공산=대구시 산악연맹 부회장이자, 화가로 활동하는 배종호(59) 씨는 추억의 장소로 팔공산을 꼽았다. "20대 후반부터 팔공산을 찾았지요. 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고, 팔공산이 좋아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올랐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찾기 시작한 팔공산은 그에게 젊은 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추억의 장소이면서도 작품의 테마가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팔공산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친분도 쌓았다. "팔공산과 '사귄 지' 30년이 넘었지만 알면 알수록 팔공산은 소중한 존재이지요. 가까운 곳에 있어서인지 대구 사람들은 팔공산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는 팔공산을 '아내'에 비유했다. 가까이 있기에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그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는 '웅숭깊다.'(되바라지지 않고 깊숙하다)는 뜻에서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과 부산 '을숙도'=백현주(50·여) 씨는 덕수궁 돌담길에 청춘이 녹아들었다고 털어놨다. "70년대 말 10대 후반 시절에 덕수궁 돌담길을 친구들과 자주 찾았어요. 돌담길을 같이 걸으면 이별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낭만을 느낄 수 있어 당시 청춘남녀들에겐 최고의 데이트 장소였어요. 그때 사먹은 군밤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지요." 명동에서 차를 마시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게 당시 '필수코스'였다.
회사원 박종률(47) 씨에겐 을숙도가 청춘이 녹아든 공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을숙도를 자주 찾았지요. 지금의 모습도 좋지만 30여 년 전에는 갈대밭과 나무 다리, 그리고 철새들이 한데 어우러져 낭만이 넘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한적한 분위기였고, 데이트를 하는 청춘남녀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고 했다. "선생님하고 친구들과 나눈 정겨운 대화와 고무 보트를 타고 갈대밭을 누비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지요. 청춘이 녹아든 을숙도를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조만간 찾아볼 생각입니다."
◆교동시장, 잔디밭, 그리고 동성로 노래방=고향인 청송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대학시절을 보낸 서충환(43) 씨에게 추억의 장소는 교동시장이다. "대학 다닐 무렵 들고 다니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워크맨이 유행했지요. 싸게 워크맨을 구입하려고 교동시장 전자골목을 누비고 다녔어요." 당시에는 대학생들에게 군대에서 입는 야전상의가 유행했는데, 이를 사기 위해서 교동시장을 찾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교동시장의 매력은 저렴한 가격에 술과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때 마셨던 '소텐'(소주와 써니텐)의 맛과 순대, 떡볶이를 잊을 수 없습니다."
박송작가 박정련(32·여) 씨는 대학시절 박물관 앞 잔디밭을 추억의 장소로 꼽았다. "그곳에서 수 만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특히나 사람이 많지 않아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적당한 곳이었지요. 또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해질 녘 노을이 예뻐 산책하기에도 좋았습니다."
회사원 손해지(24·여) 씨에게 청춘이 녹아든(?) 추억의 장소는 동성로 노래방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을 자주 찾았지요. 그곳에서 신나게 HOT 등의 노래를 부르며 고교시절을 보냈어요."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 미래 추억의 공간은?
추억은 감성으로 물든 기억의 조각들이다. 과거가 추억이 되었듯이 현재의 기억도 미래엔 추억으로 마음 한쪽에 둥지를 틀 것이다. 대구의 어느 곳이 먼 훗날 추억의 장소로 남을까. 대구시민 몇 명에게 물어봤다.
회사원 손해지 씨는 국채보상기념공원, 2·28기념중앙공원, 월드컵공원 등을 꼽았다. "테이크아웃을 한 커피나 음식을 시내 공원 등에서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누지요. 월드컵공원은 운동을 하기에 좋은 곳이고요."
방송작가 박정련 씨는 회사 앞 '문화살롱'이라는 포장마차를 들었다. 야근을 마치거나, 일이 유난히 늦게 끝나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는 날이면 포장마차에 들러 라면과 오돌뼈에 맥주 몇 병을 마신다는 것. 선·후배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선배들 욕도 하면서 시름을 푸는 곳이어서 추억의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얘기다.
회사원 서충환 씨는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를 추천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나무들, 고전적인 건물 등 외관도 아름답지만 대학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어 20~30년 후에도 추억의 공간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화가인 배종호 씨는 대구와 왜관을 오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꼽았다. 아침 8시 무렵 이 열차를 타고 대구로 와 작품 활동 등을 하고 밤 10시면 대구에서 왜관으로 가는 열차를 이용한다. "매일 열차를 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 열차가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추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도광의 시인은 매일 찾는 대구 달서구 월광수변공원과 그 뒤에 있는 문필봉을 꼽았다. "호수와 산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경관이 아름다운 데다 문필봉을 오가는 등산로도 매력이 많아요. 추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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