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흔적을 찾아 수원 화성을 거닐다

입력 2008-01-30 07:07:59

"이것이 개혁!" 200년 전 품었던 '조선의 꿈'

이름은 산. 조선의 22대 왕 정조(1776∼1800). 그가 이산이다. TV드라마 제목 때문에라도 정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정조 말고 지금 국민들이 제대로 이름을 아는 경우가 있을까. 정치적 변혁기마다 정조는 각광받아왔다. 노무현 대통령도 정조의 개혁정치를 벤치마킹하려 했고 2월 출범을 앞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주변에서도 정조시대를 연구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정조를 다룬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TV에서는 채널마다 역사 드라마 열풍이다.

정조가 변화시켜려 했던 조선의 꿈은 '화성(華城)'으로 상징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수원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임진왜란 이후 철저하게 파괴된 조선의 성곽은 정조가 축성한 화성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산성(山城)이 아니라 평야에 건설된 화성은 난공불락의 요새 개념으로 축성됐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경기도 양주에서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성과 양민들을 이주시켜 아예 신도시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재위 20여 년 만인 1795년 마침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빌미로 화성으로 8일간의 원행에 나섰다.

나에게 용순검이 있으니

번쩍이는 칼날 길이가 삼 척이로세.

황금으로 갈고리를 만들고

녹련(綠蓮)으로 칼끝을 만들었네.

문득 괴이한 빛을 내뿜더니

두우(斗牛)를 서로 다투며 쳐다보도다.

바다에서는 기다란 고래를 베고

뭍에서는 큰 이리를 잡을 수 있네.

북녘으로 풍진의 빛을 돌아보니

연산(燕山)은 아득히 멀기만 한데

장사가 한 번 탄식을 하니

수놓은 칼집에 가을서리가 어리누나.

정조가 즉위하기 전 세손 시절 지은 '보검행'이라는 시다. 이 시에서처럼 정조는 화성에 가면서 용순검을 차고 수천의 군사를 거느린 채 그동안 왕권을 위협하던 신하들에게 무력 시위를 한 셈이다.

화성은 정조가 못다 이룬 조선개혁의 꿈이 서려 있는 현장이다. 예년보다 긴 설연휴 동안 가족들과 함께 '화성'을 비롯해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남한산성, 강화도 등 드라마에서 종종 보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화성은 당시 정조개혁정치의 영수였던 번암 채제공이 성역 공사의 총 지휘를 맡았고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 감독하는 등 당시 건축과 과학의 모든 것이 동원됐다. 30대의 다산은 '거중기'를 발명, 공사기간을 2년 6개월로 당기는 데 일조했다. 국내 성곽에 벽돌이 제작돼, 돌과 함께 사용된 것도 화성이 최초였다. 성문 밖에 옹성을 설치, 공격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나 문루에 구멍이 5개 뚫린 물탱크(五星池)를 설치, 화공(火攻)에 대비하는 등 난공불락의 요새의 면모를 두루 갖췄다.

수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 지정과 더불어 팔달문과 장안문 등 4대문과 성곽이 대부분 복원돼 있다. 그래서 팔달산 정상에서부터 산등성이를 따라 축성된 화성 성곽은 5.7km로 2, 3시간이면 돌 수 있다. 그러나 성 안팎을 두루 살피면서 걸으면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화성은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있고 중앙에 있는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둘러보는 것이 좋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지만 팔달문은 옛 모습 그대로다.

예전에는 장안문과 팔달문을 오가는 거리를 중심으로 시전이 들어서는 등 상업활동이 활발했을 것이다.

중간에 있는 화성행궁은 드라마 '이산'덕분에 요즘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 '대장금'도 이곳에서 찍었다고 한다. 아직 완전하게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조선왕궁의 모습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곳에서는 주말마다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갑주 입어보기와 궁중한과 만들기 등의 문화체험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화성 축성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서남각루에서 장안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찾는 것이 좋다. 화성행궁 옆의 주차장에서 서장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만나게 된다. 얼마 전 내린 눈이 남아있는 성곽길을 걷다가 서장대에 오르면 수원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초·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함께라면 용머리를 한 '화성열차'를 타고 성곽을 둘러볼 수 있다. 팔달산에서 화서문, 장안공원, 장안문, 화홍문, 연무대 코스를 운행하고 있다. 물론 유료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 수도권 역사 현장, 이곳도 가보세요

수원 화성 외에도 서울 수도권에는 꼭 가봐야 할 역사의 현장이 적지 않다. 조선왕조의 정궁 격인 경복궁과 남한산성, 강화도가 그곳이다.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건국 직후인 태조 4년(1395년) 창건된 조선왕조의 정궁이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는 비운을 겪었다. 그 후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273년간이나 중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중건했다. 그러나 경복궁은 복원 공사 중에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고 결국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왕궁으로서의 운명도 끝이 났다.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 정문이다. 지금은 일제가 옮겨놓은 광화문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서 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5년 복원했지만 일본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자리를 옮겼다.

◆강화도

강화도는 참성단과 마니산이 있는 민족의 영지이자 외세와 맞서온 항쟁의 역사를 함께 갖고 있다. 고려 때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39년간 수도로서 대몽 항쟁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또 조선시대에는 거란족이 쳐들어오자 인조가 강화로 피신하기도 하는 등 종묘사직의 보루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때는 서양세력이 개국을 강요하면서 쳐들어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기도 했다. 이처럼 강화도에는 고려시대의 왕궁터는 물론, 갑곶돈대와 광성보 등 외세에 맞서 싸운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강화도에 가면 강화도 초입에 자리 잡은 '강화역사관'에 들러 강화도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갑곶돈대와 광성보, 광성돈대 등도 가볼 만한 곳이다.

◆남한산성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보더라도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경기도 성남과 하남의 경계에 있는 남한산성은 최근 성곽 전체가 복원되어서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기에 무리가 없다. 한 바퀴 도는 데 대략 2,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성곽을 따라 돌다 보면 중간중간 암문이 나오고 깎아지른 절벽 위의 옹성도 보인다.

남한산성에 가려면 중부내륙고속국도를 따라 서울쪽으로 진행하다가 판교쪽 외곽 순환선으로 갈 수도 있고, 서울 송파쪽으로 가다가 들어갈 수도 있다. 혹은 하남시나 광주쪽에서 43번 국도로 접어들어 남한산성 가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

'대구답사마당'(원장 이승호·053-604-1835) 등 지역여행사에서도 수시로 수원 화성과 남한산성, 강화도를 연계한 답사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도움말=대구답사마당)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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