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고요…여명의 칠불봉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저녁 무렵)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바위 옆)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에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유달리 겨울 산을 좋아한다.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겨울 산은 산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음의 고향이자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산에, 정결한 눈까지 쌓이면 그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 편안한 느낌을 안겨준다.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겨울 가야산!
'동설송(冬雪松)'이란 찬사를 받는 가야산. 모진 바람을 뚫고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에 서니 추위에 귓바퀴가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 산을 올라오며 흘렸던 땀은 금세 사라지고, 추위에 온몸이 떨린다.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겨울에 가야산을 찾으면 모든 곳이 아름답지만 그 가운데 압권은 칠불봉에서 바라보는 우두봉의 설경이 아닐까 싶다. 소의 머리를 닮은 우두봉에 하얀 눈이 쌓이면 흰 소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듯한 장관이 펼쳐진다. 나뭇가지에 핀 설화(雪花)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우두봉엔 신성한 기운마저 감돈다.
겨울 가야산은 시각적으로도 빼어난 경관을 선사하지만, 가장 큰 미덕은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정화(淨化) 기능이다. 살을 에일 듯한 추위와 등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땀방울을 동시에 느끼며 가야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날아간다. 그 다음으로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보게 된다.
눈 내린 가야산을 오르며 문득 떠오르는 시(詩) 하나가 있다.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란 시다. 겨울 산을 찾은 사람과 이 시에 나오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마음의 행로(行路)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아내와 집도 없이 가족과 떨어져 추위가 몰아치는 어느 목수의 허름한 방에 몸을 의탁한다. 좌절과 실의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하릴없이 이리저리 외로움을 달래다 어느 사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보다 더 크고 높은 것(운명)이 있어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슬픔, 한탄을 삭이고 내면적으로 승화시키며 눈을 맞고 서 있는 '정한' 갈매나무를 떠올린다. 삶에 대한 포기와 체념이 아니라 겸허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며 삶에 대한 긍정적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힘겹게 겨울 산을 오르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희망을 찾아!
눈 쌓인 가야산에 고요와 정적만 흐른다. 겨울인데다 새벽시간이어서 인적을 찾아볼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침묵에 잠기고, 흐르는 시간마저도 잠시 멈추어섰다. 산봉우리를 휘감는 겨울 바람만이 가끔 귓전을 때린다.
우두봉에서 칠불봉을 바라보니 동쪽 하늘이 점점 붉어온다. 여명(黎明)이다! 드디어 붉은 해가 칠불봉 위로 솟구쳐 오른다. 톱니바퀴처럼 하늘 향해 치솟은 칠불봉에 살짝 걸쳐 떠오르는 해는 신비롭고,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어 찬란한 햇빛이 가야산 정상부를 비롯해 흰 눈이 쌓인 능선과 골짜기 곳곳을 비춘다. 가야산에 상서(祥瑞·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로운 기운이 흘러 넘친다.
사람을 두고 영적 존재라지만 누구도 내일이 어떤 모습일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란 희망을 안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희망은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 튼실한 자양분인 것이다. 가야산 칠불봉 해돋이를 보며 새해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희망이 가득하기를 두손 모아 빌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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